복음 사색

타원

by 후박나무 posted May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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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하였듯 올해는 관구 연례피정을 따로 하지 않고, 모든 회원들이 함께 모여 지내는 성주간을 이용하여 광주 수도원에서 하였다. 강사도 외부인사가 아니라 우리 회원 중에 몇몇이 맡아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30분이 채 안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다.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보니 마치 태풍의 눈처럼 선명한 두 개의 중심이 보인다. 나의 삶은 이 두 개의 눈을 주제, 중심으로 형성된 타원이다. 첫째 타원의 중심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 가 표방하듯이 하느님을 알고 싶다는 열망이었고, 두 번째 중심은 그 하느님을 알고 보기위한 방편이었다. 힌두교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즈냐냐 요가, 카르마 요가, 박티 요가, 라쟈 요가로 나누는데, 그에 의하면 내가 주로 썼던 것은 관상기도를 통해 지혜로 나아가는 즈냐냐 요가와 학문의 연구를 주로하는 라쟈 요가였다.

 

그런데 내 삶이 이렇게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 된 것은 내가 미리 설계하고 계획한 것이 아니다. 곰곰이 살아온 나날을 돌이켜보면 이런 비전과 방법론을 미리 정하고 그에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랐던지 혹은 마음이 바라던 대로 흐름을 따른 결과이다. 강물속으로 강이 흐르듯이!

 

병이 나면서 몸이 달라지니 내 삶의 중심도 달라진다. 우선 병에 걸리기 전에는 그냥 자동적으로 거의 모든 시간이 기도와 공부에 투자되었었다. 이제는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굳고 아프기에 전처럼 장시간의 기도도 불가능하고 쉽게 지치고 기운이 없어 책을 가까이 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이제껏 선명히 보이던 태풍의 두 눈이 형태를 잃어간다.

 

그렇다고 이렇다할만하게 눈에 띄는 변화나 손에 잡힐 듯 한 새로운 중심은 아직 보이지 않으니, 레마르크의 말만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 줄 모를 때보다 더 멀리 갈수는 없다.” 마치 장님이 낯선 길을 가는 것 같다. 아브람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 낯선 곳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75세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내삶을 구축한 것이 두 개의 중심이었음이 보이듯, 새로운 중심이나 주제도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야 보이게 되는 것일까? 그때까지는 묵묵히 살아 내야만하는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