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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미 라우렌시아(광주 글방)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출퇴근하던 때가 있었다.

결혼 후 유학 간 남편을 따라 십여 년 미국 생활을 하고 귀국했을 때다.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던 때 내게 주어진 일이 있었다.

인천에서 서울 한쪽까지 한 시간 넘게 지하철을 탔다.

불안한 한국 생활에 걱정도 되고 마음이 어두운 때였다.

매일같이 오가면서 처음엔 그저 가벼운 책을 읽었다.

야곱의 우물 같은 잡지였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내 앞에 어느 분이 서 있었다.

시선은 책에 두었기에 그분의 다리만 보였다.

내가 조금 좁혀 앉으면 한 사람 자리가 날 것 같아

옆으로 옮겨 앉았더니 그분이 내 옆에 앉았다.

그 순간 잠시 후회를 했다.

얼굴은 못 봤지만 옆으로 본 그분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은 때에 절어 반질반질했고 냄새까지 났다.

그런데 그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자기 집이 화재로 다 탔다는 이야기,

힘들게 살아왔다는 얘기를 하며 지갑에서 뭘 꺼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손도 화상을 입은 듯했다.

꺼낸 것은 놀랍게도 상본.

아기예수님 탄생 상본이었다.

그것도 한쪽 귀퉁이는 찢어져 없었고 다 닳은 것이었다.

아, 세상에 우리 집엔 상본이 넘쳐나 굴러다닐 지경인데 하는 맘이 잠깐 스쳤다.

그리고는 성모님께 기도하라는 얘기를 한다.

어려운 일 있을 때... 난 주위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여 그냥 듣고만 있었다.

몇 정거장 지나 그분은 내렸다.

그분이 사라지듯 안 보이게 되자 한동안 묘한 느낌이었다.

뭔가에 홀린 느낌이었다.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어느 남자애가 다가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하고 외치고 돌아선 일.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앞에서 어느 목사 지망생이

예수님의 생애를 열정적으로 설교하던 일 등은

늘상 지하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일지언정 내게는 특별한 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성경을 통독하던 일은 더 특별하다.

책이나 읽고 묵주기도나 하며 가던 나에게

어느 자매의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게 함으로써 나도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셨다.

신약을 먼저 통독했다.

내 생애 처음이었다.

성경 속 이야기는 이천 년 전의 일이 아니라

지금 내게 들려주시는 이야기였다.

이만큼 집중해서 읽어보기도 처음이었다.

나는 다 읽고서 ‘권위’ ‘권능’이라고 요약했다.

한 마디로 그렇게 와 닿았다.

예수님의 권위, 권능.

 

그 뒤로도 시편을 읽었고 본당의 성서공부에서 구약을 읽었다.

한국에 들어와 정착하는 과정에서 불안하고 걱정투성이였던 내게

하느님은 그렇게 다가오셨다.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고 함께 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나를 위로해주셨고 힘을 주셨다.

복잡하고 서민적이었던 지하철 1호선은

내게 하느님 사랑을 느끼게 해준 성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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