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일

by 언제나 posted Nov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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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람은 죽음 앞에서 다음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나누면서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긁어모으고, 움켜쥐어 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더 나누어주지 못하고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자꾸 나서 이것을 가장 크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하고 후회한다는 것이지요. 당시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지만 지나고 보니 좀 더 참을 수 있었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참았더라면 인생이 좀 달라졌을 텐데 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친 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하며 복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며, 또 그러한 나로 인해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 삶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이런 우리 인생과는 달리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 결단을 내린 사람이 오늘 복음(Lk19,1~10)에 나오는 세관장 자캐오인 듯싶습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인생의 행복은 재물에 있다고 믿고 살아왔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자기를 지배하던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자캐오는 <구원> 받았고,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캐오는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19,7)라는 표현에도 암시되어 있듯이 그는 사람들의 손가락질 당하고 멸시받는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천하의 죽일 놈처럼 살았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는 왜 그토록 죽을 죄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일까요?

 

자캐오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사람들이 세리였는데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오직 더 했겠지 않겠습니까. 로마 군인들과 한통속이 되어 자기 민족들을  힘으로 협박하고 짓밟으면서 자기의 뱃속을 챙겼던 사람들이 당시 세리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동족을 핍박하고 로마에 빌붙어 살았던 매국노 중의 매국노였던 세리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부정하게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세리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자캐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캐오의 부는 얼마나 엄청났겠으며, 높이 쌓인 재물은 곧 그의 삶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19,2)

 

그런데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그는 직접 보고 싶었고, 참으로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컸던지 체면도 생각지 않고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19,4) 이 소박한 표현에 참으로 그가 살아왔던 삶의 고달픔과 그에 비례해서 새로운 삶과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단지 키가 작은 것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크기도 작았었지만 그는 이제 <믿음의 사다리, 영적 사다리>를 발판 삼아 예수님을 직접 보려는 마음의 간절함에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었나 봅니다. 보고자 하면 보인다는 말처럼 단지 예수님을 보는 것을 통해 자신이 자신 안에 갇혀 보지 못한 더 넓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소망의 발로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캐오는 혹여 보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절박한 마음에서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지극히 어린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에서 나무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올라 가 있는 자캐오를 보시고, 가까이 다가 와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19,5)고 하신 것입니다. 아니 이 무슨 일이래!! 단지 예수님의 얼굴 한번 보면 좋고, 혹시 나무 위에 앉은 자신을 예수님께서 눈길 한 번 주시면 더 바랄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다가와 그것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집에 오늘 머무르시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자캐오는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예수님께서 지금  내게 뭐라고 말씀하셨지, 잘 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은총의 놀라움, 믿고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는 바라는 것 이상으로 은총이 역사한다는 것을 자캐오를 통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집 안으로 모셔드린 자캐오는 즉시 지난 날 자신이 알면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잘못과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자신의 결심을 밝힙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19,8) 이는 자신을 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고 호의를 먼저 베풀어 주신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어제와 다른 삶과 사람으로 거듭나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의 사도직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당신의 메시지를 온전히 수용하고 아버지의 자녀로 살겠다는 영적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은 변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변화 시키는 힘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말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극적이고 아름다운 자캐오의 결심과 결단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10)는 말씀으로 자캐오의 고백에 구원을 선물로 내리십니다. 지금껏 돈벌이를 위해서는 동족도 배반하고 매국노가 되는 것도 서슴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자캐오는 즉각 어제와 다른 삶과 존재로 거듭난 것입니다. 마치 훗날 사도 바오로의 고백,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3,8)를 연상시킵니다. 자기 존재의 이유이자 삶의 모든 것이었던 재물을 기꺼이 포기하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고 예수님의 삶의 핵심인 비움과 낮춤 그리고 베풂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캐오의 인생역전의 시작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당하며 살아왔고, 자기 자신마저도 쓰레기와 같은 인생이었다고 느끼면서 살아온 그는 과감히 어제와 결별하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새로운 인생을 향해 거침없이 시작한 것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참된 가치를 알아주시니 자신 또한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입증해 보이려는 것입니다. 이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그 행복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참 행복을 붙잡은 것입니다. 재물의 부자였던 그가 재물을 비우고 버림으로 그 비워진 것에 육이 아닌 영으로 충만한 영적 부자가 된 것입니다.

 

자캐오와 같은 인생역전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게 어느 날 단비처럼 주어집니다. 그릇된 행동을 멈추고 새로운 길을 가는 것, 이것이 후회 없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입니다. 자캐오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이 찾아 온 순간에 후회 없는 인생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길 원한다면 오늘 <주님, 당신께서는 탈선하는 자들을 조금씩 꾸짖으시고, 그들이 무엇으로 죄를 지었는지 상기시키며 훈계하시어, 그들이 악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게 하십니다.>(지12,2)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 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