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간 화요일

by 언제나 posted Nov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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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Lk14,15~24)에서 보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14,15)고 질문 아닌 이루어질 기대 내지 희망을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께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말했는지는 잘 느낄 수 없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들의 선조 대대로 이어져 오는 선민사상을 근거로 이를 확정적인 사실처럼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도 구체적인 사례와 더불어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진 그 사람에게 당혹스럽고 지극히 부정적인 뉴앙스가 짙게 풍기는 비유를 들려줍니다. 물론 그 사람의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이 표현 자체로는 참으로 아름다운 상상이고 모든 사람의 희망사항이라고 봅니다. 누군들 이런 특별한 초대를 받지 않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그런 영광스럽고 축복받은 자리에 앉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램이자 행복이라고 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서, 자신의 표현으로 괜스레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싶어서 당황스럽고 충격을 엄청나게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비유는 즉 어떤 사람(=하느님을 암시)이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14,17)하고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보냈는데,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이 초대를 받고 각자 다른 이유를 대고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이는 평소 예수님께서 당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들려 준 구체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고, 이 거절 이유는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핑계이며 변명 사유와 같습니다. 첫째,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14,18)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은 지상적인 썩어 없어질 것에 더 관심을 두는 현세적인 사람이라고 봅니다. 즉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지 않고(Mt6,20), 땅에 쌓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적인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Lk12,20~21)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둘째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14,19) 이렇게 말한 사람은 씨 뿌리는 비유(Lk8,7)에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8,14) 사실 장사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늘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몰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익, 곧 자나 깨나 세상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14,20). 솔직히 말해서, 장가를 든 것이 나쁜 일이나 나쁜 짓은 아니고, 막 장가를 든 사람의 관심이 당연히 사랑스런 아내에 있지, 다른 것에 관심이 생길 리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혼인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1코7,33)라고 사도 바오로께서 언급했듯이, 방금 장가를 든 사람은 <성적인 쾌락에 숨이 막혀>(8,14참조) 다른 것에 관심이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저 마다 각기 다른 이유와 사정으로 잔치에 초대 받지 못함을 말했지만, 이 말을 전해들은 주인은 노하여 종에게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14,21)하고 주인의 불편한 심사를 드러내 보입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하더니만 꼭 이 말처럼 처음에는 초대받지 못한,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분들이 초대받게 되었으니 오히려 초대받으신 그분들과 이 복음을 읽는 저희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지금도 이러한 반전이 필요한 세상이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스스로 쪽박을 차게 된 이들은 누구인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다만 저는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한 게 아니라, 이 비유에서 초대하시는 분이 바로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라는 점과 그 분의 종들에게 향한 당부에 드러난 마음입니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14,23)고 하신 말씀 가운데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는 당부에 드러난 하느님의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으신 안타까우심과 함께 그 자리를 꽉 채우고 싶은 절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마음이 미어집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저희들과 함께 하시고 싶은 마음, 사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의 식사 습성이 잘 드러나 있는데, 첫째로 예수님은 혼자 드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며, 둘째로 예수님은 누구하고라도 함께 드셨지만 특별히 온갖 밑바닥 인생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드시기를 좋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사람냄새가 나고, 가장 삶의 위로와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과 자리는 다름 아닌 잔치 곧 식사 시간과 자리라고 봅니다. 저희를 향한 마음을 한시라도 늦추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각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빼놓지 않으시고 모두를 다 초대해서 함께 기쁨과 행복을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거절하거나 거부 하지 않고 이내 즉시 초대에 응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오늘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준비되어 있고, 우리 모두는 초대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식탁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저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인가를 잊지 말고 즉시 초대에 감사하며 서둘러 응답하고 나아가도록 합시다. 오늘 우리 모두도 예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성찬의 식탁에 초대받았고, 그 성찬의 식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서둘러 미사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