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도미닠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by 후박나무 posted Mar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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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사제였다가 환속한 존 도미닠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신약성서의 본문비평, Jesus Seminar, 성서고고학 분야에서 활동을 하였고 이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는다. 크로산은 자신이 쓴 ‘이야기 신학’(theology of story) 에 관한 소책자에서 신화와 비유의 차이점에 대해 이런 주장을 편다.

 

신화는 누가 봐도 뚜렷하게 보이는 현 체제의 모순을 당연시하며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이야기인데 반해, 비유란 작금의 현실이 딛고선 지반을 약화시키고 그 모순을 폭로하는 이야기다.

 

예수의 가르침이나 비유는 대부분 청중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론, 즉 위 아래를 거꾸로 뒤집어 버림으로 그들을 화들짝 놀라게 했다. 그런 면에서 예수는 확실히 예언자이며 혁명적인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는 예리코에서 고관대작이나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의 집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평판이 나쁜 세리 자케오의 집에 머물기로 한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도 그렇다. 당대의 유대인들이 받았던 충격을 우리 시대로 옮겨보면 크리스천 군목과 크리스천 사회운동가가 부상당한 크리스천 군인을 외면하고 다른 길로 간 반면에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이 군인을 도왔다는 이야기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예수는 당대에 통용되던 정의를 뒤엎는다. 포도원에서 한 시간 일 한 일꾼에게 하루 종일 일한 일꾼과 같은 일당을 지급한 고용주는 불의를 행한 것인가? 예수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고용주는 하루 종일 일한 일꾼에게 애초에 서로가 합의한 품삯을 지불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으로선 매우 후한 금액이었다. 이 일꾼들이 불평을 한 것은 고용인이 자신들에게 불의를 행해서가 아니라 고용인이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문제의 핵심은 정의가 아니라 질투다. 고용인은 짧게 일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도 하루의 생활비가 필요한 것을 알았기에 자비를 베푼 것이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낀다. 자기는 언제나 옳은 일을 하였는데, 왜 자기가 아니라 망나니 같은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가? 예수는 큰 아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질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더 총애(寵愛) 받고자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 용서받기 보다는 처벌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나라의 민주화에 커다란 일을 한 정의구현 사제단이나 정평환등도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주의 깊게 있을지도 모르는 숨은 의도(Intention) 들을 살필 일이다. 그러기에 교회의 활동이 성수를 곁들인 사회사업 차원으로 전락(轉落)하거나 국한(局限)되지 않기 위해서 꼭 영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