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18
1988년 이었다고 기억한다. 서울 대교구는 명동성당에 상설고백소를 설치하고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수도회의 협조를 구했었다. 우리 수도회는 토요일 오후 3시에서 7시까지 담당하기로 하고 그 책임은 내가 맡았었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한번은 앳된 목소리로 보아 대학교 새내기 정도로 짐작되는 분이 들어와 성사를 보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이 친구는 딱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없는데 성사는 봐야하겠으니 말하자면 죄를 만들어 고백하는 형국이었다. 예를 들어 아침 저녁기도를 안했다든지…….
그래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는 것이 재미있느냐고?” 그 아가씨는 생기발랄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다. 나는 일부러 죄를 만들어 고백할 필요는 없고 사는 것이 재미있다니 의미 있게 사는 것 같다. 주변을 보면 사는 것이 당신처럼 재미있지만은 않고 괴로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에게 자신의 삶을 조금 나누어주도록 하라고 하고는 사죄경을 외웠다. 30여 년 전의 일이 지금 새삼 생각난 것은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참 힘들기” 때문이겠다.
늘 사용하는 말도 산전수전을 통해 적확한 의미를 알게 된다. 말의 의미는 구체적인 체험과 짝 지어질 때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이다. 삶의 정황 (Sitz im Leben) 은 성서비평학에서 쓰는 개념이다. 독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삶의 자리'라는 뜻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와 “아는 게 병이라는 식자우환(識字憂患)” 은 각자 삶의 자리가 있다. 말은 구체적인 정황과 짝지어질 때 비로소 올바른 의미가 드러난다. 그리고 말과 정황을 구별하여 짝지을 수 있는 능력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유대인들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아는 것을 지혜라 했는데 이런 지혜는 많은 혼란과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다. 지금은 고진감래(苦盡甘來) 가 무엇인지 배우는 때 같다. 그리고 이 모든것은 지나가리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