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마르꼬 1, 29~39

by 이보나 posted Feb 0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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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바쁘게, 분주하게 살다, 코로나로 분주함에서 차분한 삶으로, 동적인 삶에서 정적인 삶으로 우리는 지금 전환되어 가고 있습니다. 격리와 비대면은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우리네 삶의 패턴을 새로운 시선에서 숙고하고 성찰하는 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의식 저변엔 행동이 곧 존재라는 생각이 강했기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쁜 사람이 마치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너도나도 <요즘 바빠 죽겠어!>라는 말을 입에 담고 살아왔잖아요. 코로나 이전의 삶을 보면, 애들부터 어른들까지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느림은 빠른 속도로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무능력이나 게으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리지 않으면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코로나는 우리 스스로 잃어버린 채 살아왔던 삶의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찾을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세상의 변화 속도에 맞추기 위해 우리는 무척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느림은 무능한 삶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느림은 게으름이나 무능함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멋진 변화를 위해서는 때로 이 느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마저도 바쁘게 보내십니다. 고쳐 주고 낫게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외딴곳에서 홀로 기도도 하시면서, 그런데 예수님 일상과 우리네 일상과 비슷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 하나는 바로 예수님께서는 분주함 가운데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능력’ ‘느림과 멈춤의 능력’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 ‘자신을 잃지 않는 느림과 멈춤의 능력’은 다름이 아닌 ‘기도’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께 자신을 비춰보며, 인생의 원칙을 놓치지 않는 능력, 그것이 바로 ‘느림과 멈춤의 능력’인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우리에게 살아갈 힘, 사랑할 힘을 줍니다. 참으로 분주해야 하고 신속해야 하는 것은 살아갈 힘, 사랑할 힘을 얻을 수 있는 기도함으로 바빠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바쁨은, 오늘 예수님처럼 고쳐 주고 낫게 하는, 사랑의 바쁨이 되어야 합니다. 
              

공생활의 시작부터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열정으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을 위해 많은 ‘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분주한 예수님 활동의 중심에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해줍니다. 많은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는 일이 밤늦게까지 계속돼 피곤하고 지치셨을 텐데도 예수님은 먼저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신>(Mr1,35) 다음에야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1,38) 하시며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소홀히 하였다면, 기도보다 일을 우선시하고 중요시했다면, 공생활에서 밀어닥치는 사람들과 일들 속에서 주저앉았을 것이고, 당신을 향한 반대와 비난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으면 우리의 활동은 걱정과 두려움의 덫에 걸리게 되고 맙니다. 기도가 전제되거나 선행되지 않으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선한 지향을 지닐 수 없게 되고 우리의 행동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 내가 집착한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24시간도 부족하신 분이셨습니다. (1,29-34참조) 분주함으로 피곤하실 터인데도 주무실 새벽 시간을 택하여 홀로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1,35참조) 그분은 이렇게 기도와 기도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셨고 실행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하시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그분의 모든 일은 아빠 하느님께서 일하시니 일하신 것입니다. 모든 일은 다 하느님께 속한 것이었습니다. 참 신앙은 어떤 면에서 매사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며, 우리의 일이 하느님께 기도가 되고, 기도가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대로 살아간다면, 일상의 모든 일이 다 기도입니다. 이런 삶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신심생활입문>에서 <참된 신심은 어떠한 직무나 처지도 손상치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를 아름답게 꾸민다.>고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일들로 흘리는 땀은 그것이 기도 속에서 흘리는 것이라면 진정 아름다운 보석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활동을 기도 속에 담아야겠습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일은 진정 그 값어치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는 한가한 사람보다도 바쁜 사람이 하는 것이며, 바쁜 사람이 하는 기도는 바로 聖務 곧 하느님의 일opus dei입니다.> 저는 사제로서나 수도자로써 교회 전통에 의해 하루에 정해진 시간대에 따라 성무일도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당 사제로 일하면서 느꼈던 점은 많은 경우 본당 신자들은 생각 없이 아무 때나 전화를 걸던지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대부분 기도 시간일 때가 많았으며 이는 신자들이 사제의 기도 시간을 빼앗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요. 물론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저의 어쭙잖은 생각과 달리, 새벽잠을 주무시지 않고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찾아와 그분의 기도 시간을 빼앗습니다.(1,36-37 참조)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즉시 응답하시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러 분주한 분이셨습니다.(1,38-39 참조)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문득 책에서 읽었던, 옛적 어느 수도원 수사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어느 수사가 자기 방에서 기도서를 들고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급한 일로 부탁을 하러 왔습니다. 그 수사는 즉시 기도를 중단하고 나가서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마저 기도하기 위해 기도서를 펼쳐보니 자기가 중단했던 부분에서부터의 기도문이 황금색으로 변해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에 보태는 황금과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의의 실천으로 사랑을 위해 흘리는 땀은 우리의 기도 속에서 보석처럼 값지게 빛날 것입니다. 그렇듯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로 바쁜 사람의 삶은 그 자체가 기도이고, 그런 일로 바쁜 사람은 동시에 하느님께 기도하기를 늘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하는 게 모두 하느님과의 관계 하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해야 할 일로 바쁜 사람일수록 기도 시간을 더 가지려 노력하는 마음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해야 하는 일로 바쁘더라도 그 가운데 기도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그 하는 일 자체를 기도로 승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와 사랑은 본디 하나이며, 다만 기도는 들숨이라면 사랑은 날숨이기에 기도와 활동의 조화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금년 저희 수도회는 창립 300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저희 창립자의 삶은 <물러남과 머뭄과 나감>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고독에로 물러나 주님의 현존 안에 기도로 머물고, 기도를 통해 체험한 하느님 사랑의 업적인 십자가를 선포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갔었습니다. 제가 처음 입회할 때, 저희 수도회는 분명 활동 수도회인데 <반관상 반활동 수도회>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로 인한 오해도 많았지만, 오늘 복음을 보면서 새삼 그렇게 소개한 까닭을 이젠 알 것 같습니다. 활동 수도회인 우리 수도회는 기도와 고독에로 물러남과 머뭄 없이는 우리의 십자가 선포는 한낮 공허한 외침이며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창립자 십자가 성 바오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하느님 앞에 늘 끊임없이 기도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느라 지칠 줄 모르는 설교자이셨고 관상가이셨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기도와 활동을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느냐가 우리에게 주어진 수도 생활의 과제이며 관건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도직 열정을 잃었는데, 그 이유는 기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 기도하며 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