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묵상은 부활 성야와 부활 대축일 복음을 함께 묶어 편집하였습니다.

by 이보나 posted Apr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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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야 마르꼬 16, 1 ~ 7 + 부활 대축일 요한 20, 1~ 9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가 걸어 온 사순시기는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회개의 때’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부활 역시도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때입니다. 부활은 사랑으로 회개, 기쁨과 환희로 회개, 생명으로 회개가 꽃 피고 열매 맺는 시기이며, 그래서 사순시기보다 훨씬 긴 기간인 까닭은, 부활은 우리 믿음의 전부이며 정수(精髓)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1코15,14참조)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의 기쁨을 아직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쁨과 이 기쁜 희망의 소식을 전하도록 힘차게 우리네 삶의 자리로 달려갑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해도 잊지 못하는 것이며, 그리움과 간절함의 깊이와 높이, 길이와 넓이만큼 그 사랑은 꼭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리라 확신하며 잊지 못하고 기억을 회상하면서 그 기억의 흔적을 따라서 찾고 또 찾습니다. 그래서 끈질기게 집요하게 찾는 사람은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부활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부활의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성들은 이런 점에서 주님을 찾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델이자 본보기입니다. 우리 역시도 막달레나와 같은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 그리움이 간절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부활 성야 복음(Mr16,1)에서는 여성들이 막달레나와 함께, 대축일 복음(요한)에서는 막달레나 홀로 아직도 동이 트기 전, 어둠처럼 무겁고 짓누르는 슬픔과 절망의 상태에서 새벽의 정기(精氣)를 받으면서 무덤에 묻히신 주님께로 달려갑다. (Jn20,1) 그녀들이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일상의 익숙한 행위가 아니라 아주 낯선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온전히 부활의 새로움을 깨닫지 못했으며, 그러기에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Mr16,3)라고 걱정하며 달려갔습니다. 이런 인간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하는 주님에 대한 그리움과 돌아가신 분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 처절한 주님께 대한 그리움과 열망이 강했기에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장애와 걸림이 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둠도 무서움도 심지어 주님의 죽음까지도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였기에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마저도 그녀들과 그녀의 간절함을 가로막지 못했나 봅니다. 무엇이 그녀들과 특히 막달레나의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가로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로8,35참조)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은 이미 굴려져 입구는 열려 있었습니다. 무덤은 이미 텅 비어있었습니다. 빈 무덤에 들어갔더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Mr16,5)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젊은이가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Mr16,6)고 말해 줍니다. 주님께서 ‘여기 아니 계시다’는 표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주님은 이미 거기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덤이 비어있다고 해서 아직은 부활을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빈 무덤은 부활의 표징의 전부는 아닙니다. 빈 무덤은 단지 물리적으로 빈 것, 곧 텅빈 것입니다. 빈 무덤은 <주님께서 살아나셨다.>가 아니라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뿐입니다. 즉 빈 무덤은 부활의 표징도 아니고 선포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약속의 시작이며, 부활 신앙을 위한 열림입니다. 그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은 끝남입니다. 즉 빈 무덤은 이제 예수님께서 공간적으로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나는 있는 나다.‘>고 말씀하신 대로, <항상 함께 계실 것이다.>는 선포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런 빈 무덤은 현재의 <여기 아니 계심> 보다 오히려 아직 끝나지 않은 약속의 성취로 <없음 가운데 늘 함께 계심>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증거입니다. 이를 알아듣기 위해 지금껏 지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체험하고 습득한 모든 머리와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틀에 박힌 인습, 고정관념과 하느님의 거짓된 이미지)들을 빈 무덤에 벗어 던져 내려놓고, 오히려 빈 무덤처럼 우리의 위선과 거짓의 옷을 벗어놓고 비워야 합니다. 가로막았던 돌이 굴러져 있었던 것처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고 부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부활 체험은 약속의 성취를 체험하고 난 뒤 자기 자신 안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 공유할 때 더 강력해집니다. ‘여기서’가 아니라 이 약속의 성취는 ‘거기에서’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빈 무덤은 나를 위해서 돌아가신 분이 부활하시어 여기 아니 계심을 확인하는 장소일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빈 무덤에 계시지 않으니 어디에서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게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국한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제 빈 무덤에서부터 부활 신앙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빈 무덤은 이제 갈릴레아(=사도들처럼 우리 역시도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사랑을 나눴던 장소)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거기에서 부활은 생생한 사랑의 기억으로 충만할 때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굳이 <이곳이다. 혹 저곳이다.>고 장소를 국한시키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예수님을 만나길 원하는 사람은, 늘 함께 계신 그분을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첫 증거자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였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막달레나의 주님께 대한 사랑은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Lk7,47)는 주님의 말씀의 본보기입니다. 여성들의 슬픔과 그리움이 사도들보다 더 깊고 강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막달레나는 부활의 수혜자인 <주님의 신부>인 교회를 상징하며, 부활의 신부인 교회는 곧 부활의 진실성(=당대엔 여성은 법적 증언이 될 수 없었음)과 파급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부활 목격 증인으로 유효하지 않은 여성의 가난함, 무력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실성 내지 진정성의 담보가 되었습니다. 특히 여성의 전파력(*부정적 관점이 아닌 긍정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수다 본능=정보력!)이 그 파급의 진원지이며, 가장 강력한 무기인 입소문의 전파력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선포하고 파급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뵈옵고자 하는 그리움에서 무덤으로 달려갔던 막달레나는 이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다시 기쁜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서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Jn20,2) 그러자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달려갑니다. 아마 우리 역시도 힘있게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각자가 달려가서 자신이 직접 확인해야 하며, 그때 비로소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달리기입니까? 신앙은 하느님을 향해 달려가야지, 세상을 향해 달려가서는 아니 됩니다. 나이 든 사람도 젊은 사람도, 남성도 여성도 달려가야 합니다. 함께 달려가겠지만 각기 자기 능력에 따라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또한 복음은 참으로 어른을 어른으로 존경하고 배려한 요한의 마음을 엿 볼 수 있는, <먼저 다다랐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베드로가 들어간 다음에 그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20,5.8)는 라는 표현은 참으로 아름다운 서술입니다. 부활의 신비를 바라보는 교회 지체의 다양한 시선 곧 ‘노인과 젊은이’,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성’, ‘제도와 은사’들이 모아져 예수님의 부활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을 때 더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모든 교회 구성원에게 필요한 부활 체험 신앙의 증언은 한 마디로 <보고 믿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교회 구성원의 부활 체험의 다양함은 곧 교회의 영성의 풍부함이자 생명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비를 살아가기 위해 사도 바오로는 <육이 아닌 영으로, 땅이 아닌 하늘로, 아래가 아닌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3,1.2참조)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빠 하느님의 뜻 곧 세상의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당신과 함께 죽고 당신과 함께 부활을 살아가기 위해 이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콜3,2) 부활의 증인은 예수님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과 고난 가운데 그분의 파스카 신비를 되살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의 증인이 되었기에, 우리네 삶에서 주님처럼 진리가 아닌 곳에서, 사랑이 아닌 곳에서, 생명이 아닌 곳에서 어제의 낡고 묶은 자아는 죽고 비워 그리스도의 부활을 입은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거룩하고 은혜로운 부활 시기를 살아가길 바라며, 부활을 다시금 축하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