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성월 특강(1): 성모 신심과 공경

by 이보나 posted May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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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5월입니다. 5월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라는 가사가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성모성월을 맞아, 여러분에게 성모님은 어떤 분이시며, 성모님을 생각할 때 어떤 이미지가 다가옵니까? 저는 누이 죽고 나서 처음 성당 내부로 들어갔을 때, 첫 인상은 엄청 무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땐 알 수 없었지만 제대와 제대 후면에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상과 벽면에 부착되어있는 십자가 길 14처를 보는 순간 거의 충격에 가까웠었습니다. 그나마 처음 본 피에타 상의 모습에서,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시신을 부여안고 계신 모습에서 제 누이 잃고 통곡하셨던 어머니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다가온 모습에서 그나마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훗날 어머니 돌아가신 후 엄마의 빈자리를 찾고 있던 저에게 메쥬고리아에서 ’성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요.‘라는 가이드의 한마디로 눈물을 쏟고 난 뒤 성모님을 어머님으로 모셔드리게 되었습니다.

 

성모성월을 보내면서 성모 신심과 공경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양한 측면이 있지만, 몇 가지 핵심만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모 공경과 신심은 사도 시대로부터 복음이 전파되면서 함께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선언하셨는데’, 이 선언을 통해서 성모님께서 성모찬송에서 언급했던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1, 48~49)라는 예고가 성취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성모님께 가장 영예로운 명칭이며, 이 선포 이후 성모님께 대한 공경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게 되었고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다는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도 아직도 성당 마당 한 구석엔 어김없이 성모상이 서 있습니다. 성서학의 발전으로 새삼스레 성경의 핵심 주제가 바로 추종의 영성이라고 밝혀지면서, 성모님은 제자의 참된 표상으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 추종,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탈(=떠남)과 포기(=버림)’이며, 이런 관점에서 성모님은 참된 제자의 표상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제로 사시면서 한생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분이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이시기 때문입니다. 1994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인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신자들의 모범이신 것은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실천의 힘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에서 나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그리고 책임있게 받아들이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리아를 본받아야 하는 이유는 마리아께서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표양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성모님에 대한 신심의 핵심은 한 마디로 “성모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길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께로 가는 여정의 가장 좋은 안내자이시고 중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불교 선문답에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표현처럼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성모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서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성모님의 모태에 잉태(=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셨다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당신 몸에 담으셨다는 것이며, 그래서 성모님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말씀을 간직하고 기록하셨습니다.

 

거울은 영적 생활의 중요한 표상이며, 우리의 지금 ’있는 모습‘을 통해 미래 ’되어야 할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닮고 추종하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에서 진정한 거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의 모든 지체인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에게 ’성모님은 참된 신앙의 모범이며 모델‘과도 같은 분이시기에 성모님이란 거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단테는 “그리스도를 제일 많이 닮은 얼굴을 쳐다보라. 그 광채만이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보게 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성모님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제-오늘-내일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잃어버린 본래의 인간 그리고 내일 우리가 되어야 하고 누릴 상태를 앞당겨 비추어 줍니다. 이렇게 본래 면목을 회복하고, 되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지금이라는 현재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비춰 보여 주시는 분이 바로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이 보다 더 완전하고 투명한 거울이 없습니다. 1854년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교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악마의 유혹에 굴복했던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잃었으며, 그로인해 추방되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마리아는 악마를 통해서도, 세속을 통해서도, 자기 자신을 통해서도 결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자신의 순수성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모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과거 성모 무염시태라고 지칭했음)이시라고 선언할 때 말하는 의미입니다. 즉 성모님은 우리의 과거 곧 창조 때의 본래 모습을 잃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신 분이시며, 성모를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무죄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과 같은 아주 특별한 은총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언제가 우리에게도 주어지리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원죄 없으신 잉태교리를 확인하듯 루르드의 성모 발현이 1858년 일어났습니다.

 

또 다른 교리는 1917년 파티마에서 성모님의 발현이 있고 난 뒤, 1950년에 성모 승천 교리가 확인되었습니다. 성모님은 미래에 우리가 누리고 받을 모습을 앞당겨 받으신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와 삶, 은총과 성덕으로 충만한 삶은 바로 성모 승천의 근거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원죄에서 벗어난 존재였고 일생을 티 없이 곧 죄 없이 깨끗하게 사셨고, 은총과 성덕이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따라서 죄의 결과인 육체의 죽음과 부패로부터 면제되셔야 합니다. 성모승천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리란 성모님의 영혼과 육신이 완전한 구원이라는 목표에 이미 도달했고 우리도 앞으로 그 목표에 도달할 희망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목적지가 천상이며 지상은 천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나그네 길임을 보여 줍니다. 아울러 지상의 삶이 천상의 영광을 결정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런 점에서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4단과 5단을 묵상할 때마다 성모님의 승천과 천상 모후이심의 의미를 되새기고 성모님을 본받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성모님은 인류의 잃어버린 본 모습과 되어야 할 모습을 간직하신 분으로 이 지상의 삶을 살아가시면서 하느님 아드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써, 최초의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의 참된 본보기이자 모범이셨습니다. 무엇보다 성모님의 첫걸음은 바로 하느님의 선택과 응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한 천사의 아룀과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천사의 예고를 받으셨던 마리아는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을 수용하는 신앙의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축복을 통해서 마리아가 확인한 신원과 사명은 1) “당신은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다.”는 사실 곧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는 것이고. 2)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의 표상이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교 도중에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8,21)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관점도 중요하지만 이를 증명하듯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고, 그 믿음에서 아드님의 잉태로부터 시작해서 아드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그 모든 고통과 힘듦을 봉헌하시고 그로써 하늘에 아드님과 함께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성모님에게 주어진 수많은 호칭이 생겨났습니다. 이 많은 호칭 가운데 첫째가는 호칭은 바로 ‘성모님은 은총의 중재자’이십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서 은총을 전구해 주시는 중재자이십니다. 많은 성인들의 가르침에서도 드러나듯이, ‘성모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당신 아들 곁에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중재 역할과 중재 기도는 예수님의 첫 기적이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명백하고도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카나의 첫 기적은 성모님의(=여성의) 섬세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돌보는 능력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통해 성모님은 즉각 혼인 잔치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떨어짐을 알아차리시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님께 먼저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알리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아룀을 듣고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는 오지 않았습니다. ”(루2,4)라고 하셨지만, 어머님의 간청에, 중재에 힘입어 마음을 바꾸시어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때’를 앞당겨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토록 성모님의 전구는 주님의 마음과 하느님의 때를 바꾸시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그날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2,11) 이처럼 성모님의 중재와 전구의 힘을 교회는 알고 끊임없이 성모님의 중재와 전구를 간청하였으며 그 증거는 3세기부터 작성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용되고 있는 성모 찬송가 중의 하나인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Sub tuum praesdium’ 기도문으로도 입증됩니다. “천주의 성모님, 당신의 보호하심에 저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 그러기에 일찍부터 성모님께 대한 호칭도 ‘바다의 별, 간구하는 자들의 도움, 고통에 시달리는 자들의 피난처’ 등으로 찬양해 왔던 것입니다.

 

이런 성서와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교회 교도권은 특히 요한 바오로2세의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에서 이를 이렇게 밝히고 있는데, <성모님의 중재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모든 은총은 하느님을 통하여 예수님께, 예수님을 통하여 마리아께,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모님은 은총의 중재를 통해서, 1)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서 우리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도록 이끄시며, 2) 우리가 예수님을 닮도록 이끄시고, 3)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임종을 맞이하는 이들과 이미 세상을 떠난 연옥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성모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둘째는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시고,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요한 복음 19장에 보면 십자가 밑에 성모님은 “서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 서 계시기까지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시고, 동반하셨습니다. 아드님과 하나 되시어 모든 것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이미 시메온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2,35)라는 말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아드님의 파스카의 여정을 동행하신 이후 십자가 밑에 서 있습니다. (=성모 칠고: 시메온의 예언-이집트 피신-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음-십자가 길에서 만나심-십자가 밑에 서 계심-예수님의 시신을 않으심—묻으심)

 

여느 모성처럼 아닌 어떤 모성도 성모님의 아드님에 대한 사랑과 비교할 수 없으며, 아드님으로 인한 고통을 어떤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의 고통은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비례합니다. 영혼의 순수함 때문에 마음의 두 가지 기능, 즉 민감성과 응수성 측면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모든 고통과 아픔이 성모님께 온전히 전이되고 상치相値되어 더 깊이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아플 수 없을 때 느껴지는 아픔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에 아드님을 대신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기에 성모님의 마음은 외적 고통이라기보다 내적 통고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예수님과 하나 되어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마음으로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신앙으로 성모님의 통고를 묵상하고 성모님을 닮고자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이란 십자가를 잘 짊어질 수 있고 성화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심으로 사셨던 분이 바로 저희 예수고난회 통고의 성모 가브리엘 성인이십니다.

 

이토록 심한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성모님은 실의에, 무게에 지쳐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고 아드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로 아드님의 십자가 밑에 꿋꿋이 서 계셨습니다. 어떤 두려움과 고통의 번뇌에 넘어지지 않고 연민과 사랑의 힘으로 충만하여 아드님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습니다. 이 순간부터 이미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의 어머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서 계십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요19, 27) 이는 단지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19, 26)라고 어머님께 유언을 하신 까닭은 어머님께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시어 당신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으로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어머니의 사랑도 “마리아가 우리 중 어떤 누구에게 대한 사랑에 비교하면 애정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퐁소 성인은 말합니다. 이토록 십자가 아래에서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을 가득히 받도록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듯이 오늘날도 어머니로서 우리가 당신 아드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은총,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은총을 전구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낙담하고 실의에 빠질 때, 고통으로 힘들어 할 때, 위로와 힘을 북돋아 주시고 그에 따른 고통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말없이 곁에 서 계시며 격려해 주십니다. 그분을 우리의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모실 때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처럼 우리 역시도 어머님을 우리 가정에, 본당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나의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공경할 때 비로소 성모님이 나를 돌봐주시는 나의 어머니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당신 삶의 모든 여정을 마치고 아마도 우리가 잘 아는 마니피깟을 노래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잉태 예고와 엘리사벳 방문에 이어 나옵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삶의 모든 것을 겪고 나신 후 성모님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마음에 간직했던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다시금 신앙으로 돼새김 하시면서 이 찬양의 노래를 세상의 자녀들인 우리를 위해 힘차게 불렀지 않았을까 믿습니다. 성모님의 한 생은 믿음의 빛 속에서 보이지 않으신 하느님께서 자신과 세상의 모든 자녀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시며 사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의 기쁨은 단지 성자의 어머니가 되신 사랑의 기쁨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회상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고 하느님 안에서 기뻐 용약하셨던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이다.”성모님께서 이토록 기뻐 뛰신 것은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단지 성모님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마리아처럼 겸손하게 하느님을 찬미하며,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시다. 그때 비로소 새로운 질서가,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며 그땐 모든 것이 다 역전될 것입니다. 그날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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