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유머

by 후박나무 posted Jun 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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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프로스트가 ‘두 갈래 길’에서 말했듯이 살아가면서 여러 번 하나의 길을 선택하므로 다른 길을 포기하게 된다. 세월이 지난 후 돌아보면 하나의 길이 어떻게 다른 길로 이어졌는지, 두 갈래 길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지는지 또 어떻게 여기까지 이어졌는지 보이게 된다. 이때 우리는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던가 섭리라는 말을 하게 된다.

 

선택 혹은 포기의 계기가 된 것은 어떤 만남이었다. 사람과의 만남도 있었고 책과의 만남도 있었다. 내 경우 박귀훈 요한 신부님과 박도세 신부님과의 결정적 만남도 있었지만, 책을 통한 만남이 더 잦았고 지속적이기도 하다. 아오스딩도 ‘집어라. 그리고 읽어라! (Tolle, lege) 손에 들고 읽어라!’를 통해 전환점을 마련하지 않았던가. 이점에선 우리 모두 호렙산의 동굴에 머물다 ‘가늘고 여린 목소리를 들었던’ 엘리야의 후배들이다.

 

중학교를 마치고 아직 고등학생이 되기 전 과도기 2월 어느 날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때 신약성서의 산상설교를 통해 예수를 알게 되었고 고3 여름 방학 때 그야말로 “재수 없게” 파스칼의 ‘팡세’를 읽게 되어 매우 염세적인 색깔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전적으로 파스칼의 탓이 아니라, 나의 성장배경에 잠재되어 있던 기억들이 발호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팡세의 쟌세니즘적 허무주의에 4~5년을 시달리다 해방된 것은 부활체험을 통해서다.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골고다에서 루카 복음의 예수는 “당신이 왕이 되어 오실 때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라는 오른쪽 강도의 청에 “정녕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는 대답을 하고, 이는 내가 들은 말씀이기도 하다.

 

헤르만 헤세가 창조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캐럭터중,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는 학자인 나르치스를 높이 평가하고, 또 다른 나인 감성적이고 문학적이며 한량 같은 예술가 골드문트적 자아를 무시했다. 십자가에 달려 예수님의 그 말씀을 직접듣기 전에는 본성을 거스르며 이성일변도로 살아왔던 것 같다. 깊이 억압된 이 본성은 강아지랑 놀 때 흔히 자유롭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파티의 흥을 깨지 않게 포도주를 많게 하신 것을 보나, 적대자들로부터 먹기를 즐기며 포도주를 탐하고 세리나 죄인들하고 어울린다는 비난을 받던 예수님 자신은 분명 안그랫음직 한데 복음이 그리는 예수님은 현저히 유머감각이 떨어진다. 우리보다 그리스도교 역사가 훨씬 긴 유럽과 북미에는 성서의 이런 빈구석을 메어주는 건강한 유머가 많다. 그 중 하나…….

 

일생을 거룩하게 산 프란치스칸 수사신부님이 임종을 맞게 되었다. 수사 신부님은 원장신부에게 유언으로 하나의 부탁을 하셨다. “제 가 임종하는 침대 좌우에 도미니칸(도미니코회원)과 제수이트(예수회원)를 세워 주십시오.” 원장신부님은 그거야 어렵지 않다고 하면서 혹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 여쭈었다. 프란치스칸 수사신부님은 “저는 평생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살려 애썼습니다. 이제 임종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처럼 두 강도 사이에서 죽고 싶습니다!” ^^

이 신부님은 경쟁관계에 있던 도미니칸 수도회와 예수회 회원을 강도로 여기셨네요. ㅋㅋ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아는 것이 힘이기도 하고 병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각 언명은 그에 걸맞은 상황과 짝지어져야 한다. 그런 정황에 대한 고려 없이 일방적으로 모든 상황에 적용한다면 바리사이적 거짓영성을 조장하여 비인간이 되거나 세심증 환자를 양산하고 하느님은 좁쌀영감 정도로 격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