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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복음 사색

vorverständnis [전이해(前理解)]

by 후박나무 posted Apr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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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에 힘이 없고 물먹은 솜처럼 몸이 자꾸 땅에 눌어붙는 것 같아 어제는 마사지도 받았다. 요 며칠 몸이 많이 불편하여 오늘 미사주례도 부담이 되었는데, 공진단 덕분에 지친 모습 보이지 않고 잘 마쳤다.

 

오늘은 새벽 3시에 깨어 더 이상 잠이 안와 노느니 염불한다고 “이해(理解)” 라는 말마디를 생각해보다. 먼저 한자어로는, 소를 칼로 해체하여 부분 부분을 알고 깨닫는다는 뜻이란다. 영어로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 밑에 under 선다 stand 는 뜻으로 무엇이든 배우려면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뜻이 있다. 그런 면에서 독일어는 보다 적극적이랄까 도전적인 뉘앙스를 준다.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밑에 서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verständnis를 쓴다. 또한 무엇이든 이해하고자 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인 vorverständnis [전이해(前理解)] 가 있다. 보통 학업에서 복습보다는 예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전이해와 관련이 있다.

 

각자는 나름대로 삶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인생이란 어떻게 영위되는지, 관계를 어떻게 맺고 이어가는지에 대한 전이해가 있다. 외국어로 강의를 들을 때 교수의 말을 반밖에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지금 교수가 어떤 내용을 어느 방향으로 강의하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생의 밑그림이다. 조각그림 맞추기처럼 우리는 나름대로 형성된 밑그림을 바탕에 깔고 살아가며 겪는 여러 체험들을 마치 조각그림처럼 맞추어 나간다.

 

평온한 일상을 영위할 때는 매일 매일의 체험이란 조각은 기존의 밑그림에서 자기자리가 있다. 그러다 이제껏 살아온 삶과는 아주 이질적인, 하느님에 대해 가졌던 전이해와도 전혀 양립할 수 없는 체험을 하게도 된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도전서 13:11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했다.

 

물론 사도 바오로와는 달리 어릴 때의 세계관, 신관, 인생관을 견지하고자 새로운 체험을 사장할 뿐 아니라 새로운 체험을 할 기회마저도 자신에게서 박탈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살아가는데 쓰여야 할 에너지를 자신의 일부를 부정하고 감추고 억누르는데 탕진한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간음한 여인을 고발하며 예수를 다그친다. 그들은 예수가 어떤 대답을 해도 반대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있다. 그야말로 가득 찬 찻잔이다. 아무리 좋은 차를 따라도 넘쳐흘러 버릴 것이다. 예수의 응답은 전혀 그들의 상상 밖이었다. 예수의 침묵 앞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분주히 돌아가던 그들의 생각이 삐거덕 대기 시작한다. 예수의 침묵이 길어지면서 어쩌면 그들은 “너희는 멈추고 나를 알라!” 는 시편을 기억했을지도…….이제 어느 정도 남의 말을 들을 여백이 생긴 그들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히브리 4: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에피소드의 역사성이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는 보도에 있다고 본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이 아닌지 알게 된다. 모 아니면 도라고, 젊어 이상에 불탈 때와는 달리 사뭇 자신에 대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며 연민도 깊어진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약함을 알려주어 여인으로 하여금 자기혐오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이 그리던 밑그림은 크게 변화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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