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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복음 사색

나귀

by 후박나무 posted Apr 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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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ktx로 광주수도원에 오다. 진이 빠지는 어려운 여행이었다. 비는 오지 않고 꾸물거리던 날씨도 한 몫을 더하다. 송정에서 광주 수도원까지는 승용차를 이용했는데 몸과 마음에 긴장을 배가 시켰다. 승객을 신속하면서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하고 승객의 입장에서 느끼고 배려할 수 있다면 Best Driver 다.

 

성지주일 미사후 광주 명상의 집 경내를 산책하다. 로마에 머물던 시절 91년 부활절 휴가 2주를 이용하여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갔었다. 바로 오늘 성지주일에 올리브 동산 중턱쯤 있는 벧 파게 경당에서 예수로 분장한 사람이 전쟁과 폭력을 상징하는 군마대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하는 행사가 있다. 그 행렬에 끼어 걷던 때도 회상하다.

 

노새, 나귀, 당나귀, 사슴, 고라니등의 목소리는 정말 기괴망측하지만 눈망울이나 눈매는 더할나위없이 정말 부드럽고 예쁘다. 온갖 동, 식물,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세상을 좀 더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기는커녕 좀 더 잔인하고 살벌하며 오염된 곳으로 만들어가는 것 같다. 시애틀 추장의 말대로 “인간은 그물을 짜는 존재가 아니라, 그 그물의 한 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사실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다. 숨 쉬는 것, 살아있는 것에 관심을 가질수록 그들의 생명과 그들의 행복 또한 소중하게 여겨진다. 이런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그에 비례하여 고통이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네 삶이란 게 천지창조 이전부터 각자를 부르신 성소를 따라 알게 또 모르게 영위된다. 타볼 산의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의 삶을 전범으로 자신이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가야할 길을 내다본다.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자신이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되는 과정으로 보인다.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은 야곱은 야뽁나루에서 홀로 고뇌하다가 하느님의 사람을 만나 밤새도록 씨름을 한 후 새로운 이름, 정체성을 갖게 된다. 하느님과 싸워 이긴 자, 이스라엘로! 야곱의 예에서 보듯이, 가장 단순하고 쉽게 자신의 성소를 알 수 있는 것은 세례명을 통해서가 아닐까? 내 영세명 성인은 테베의 성. 바오로 , 혹은 은수자 바오로로 불린다. (이집트의 테베근처에서 230년경 태어나 341년 테베의 사막에서 선종하다, 축일은 1월 15일이며 최초의 크리스천 은수자로 여겨진다.) 바오로라는 영세명은 수도회에 입회하여 은수생활을 할 것임을 가리키고, 후일 수도 명으로 받게 될 ‘예수고난회 학생들의 주보성인’ 가브리엘 포센티는 은수자로서 주로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군마대신 나귀를 탄 예수는 오늘 자신의 운명으로 한 발 더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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