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상설고백소

by 후박나무 posted May 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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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차원에서 명동성당에 상설고백소를 설치, 운영하던 초창기 때의 일이다. 수도회마다 고정으로 특정 요일을 맡아 성당 뒤쪽에 있는 지하성당에서 성사를 주었다. 우리 수도회에서는 내가 나가게 되어 토요일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담당하였다. 가는 길이 서로 현저히 다르고 또 수도생활이라는 특별한 생활양식으로 인해 수도회 입회 후에는 중, 고교, 대학시절의 친구를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비록 공무이지만 한 주일에 한번 명동이라는 번화가의 한복판에 가게 되니 친구들도 소식을 듣고는 자주 명동으로 찾아와 만날 수 있었다. 옛 친구들과 만나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는지 그리고 그 후 얼마나 달라졌는지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그려졌다.

 

친구들을 만난 어느 날 나는 문득 친구들과 내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인 우리들은 사는 곳은 달랐지만 속한 계층 혹은 계급은 같았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에는 평준화 이전이었으므로 중학교 입학서부터 시험을 치러야 했다. 서울의 일류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우리들의 가정은 물론 중산층에 속했고 비슷한 지적능력과 관심분야가 겹쳤기에 친구가 되었다. 공부와 특별활동외의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기회조차 없는 넉넉한 가정이었다. 물론 집집마다 사람 사는데 따르는 사정이야 차고 넘쳤겠지만! 그런 식으로 같은 계층 속에서 그룹이 형성되고 그룹 속에서 친구가 되고 대학도 얼추 비슷한 곳을 다니게 되고, 졸업 후의 직장도 같은 계층의 사람들로 둘러싸여 살게 된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나는 다른 길을 택했다. 아니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사회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야했고 그 결과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느님이라는 별을 따라가다 만난 사람 중 어떤 경우엔, 내가 사회에 산다면 상종조차 하지 않을 사람도 있었다. 요컨대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아무리 죄가 많아도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공로 하나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있겠나! 억지로 같이 살게 된 사람 중에는 학력, 지성, 집안환경이나 문화 등이 생판 나와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이 길을 가지 않았다면 나는 역시 지금도 나와 같은 부류의 그 친구들과 지내고 있을 것이다.

 

마티아 사도는 사도라고 불리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지원기, 외부 청원기, 내부 청원기, 수련기, 유기서원기등 초기 양성과정을 마티아 수사와 함께 지냈지만 아직도 잘 모른다. 오랜 세월을 함께 했기에 이심전심되는 부분도 많지만, 우리의 출신과 성장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갭도 크다. 하느님을 보고자 별을 따라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는 친분을 맺지 않았을 터이니 하느님의 말씀이 옳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