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야훼의 종- 신원의 모호성

by 후박나무 posted Aug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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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양 우철 야고보 부제의 석사학위 논문 “주님의 종의 넷째노래에 내포된 ‘고난’ 에 대한 성서 신학적 고찰”을 읽었다. 석사학위 논문으로 인준을 받은 날자가 2019. 7. 22 이니까 아직 식지 않은 따끈따끈한 논문을 읽은 셈이다. 하긴 고난이라 할 때 속뜻은 Compassion 이지만 열정(Passion)을 뜻하기도 하니 이런 주제의 논문을 쓰게 하고 상식 속에 감춰진 깊은 의미를 통찰하게 한 최초의 영감이 더욱 타오르기 바란다.

 

먼저 고난회원으로서 제 2 이사야의 야훼의 종의 넷째노래를 논문주제로 선정한 것에 대해 대견하기도 하거니와 고마움을 느낀다. 양 부제가 학위논문의 주제로 제 2 이사야의 본문을 선정한 이유는 아마도 이 본문이 저자가 살아온 삶에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일 것 같다. 선의 화두가 그러하듯 타인에게서 주어지거나 흉내만 내는 거짓문제는 결국 거짓된 답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삶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진정한 문제가 있을 때 비로소 야훼의 종의 노래와 같은 텍스트는 꼭 넘어야 할 산이 된다. 그 산을 넘지 못한다면 살수도 죽을 수도 없는 질곡에 빠지게 된다.

 

전문적이라 지루하기 쉬운 본문주석은 건너뛰고, 나는 야훼의 종의 신원을 다룬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았다. 양 부제는 야훼의 종을 특정한 인물이나 집단이 아니라, 의도된 모호성으로 해석하여 말하자면 누구나 야훼의 종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나는 이것이 이 논문의 백미이며 탁견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도 성서본문을 쓰던 원저자는 의도하지 않았고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뜻이 후세에 드러난다는 Sensus Plenior 은 적용된다. 선남선녀, 장삼이사 등 이제는 누구라도 선한 뜻을 갖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은 많은 이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을 수 있고 서로 짐을 나누어 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최고계시라 일컬어지는 마태오 복음 25장 31~46 의 최후의 심판은 야훼의 넷째종의 노래의 최종 귀결이 아니겠는가!

앞으로의 수도생활에서도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로 야훼의 종이란 텍스트를 처음 대했을 때의 첫 마음, 그 설렘과 열정을 보존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바란다. 그 성소를 살 때 우리는 오늘 예수의 성변용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본모습을 찾을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