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마리아 막달레나의 여성성!

by 후박나무 posted Jul 2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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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서울 아산병원에 가 주치의 이 종식 교수를 만나다. 시네메트의 생산중단으로 레보도파의 공급원인 퍼킨 정을 하루 9알씩 처방한대로 3달간 복용했더니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 온다. 주치의와 상의하여 하루 6알로 줄이기로 하다. 다른 약은 그대로다. 다음 만날 날은 내년 1월 이다. 주치의를 6달에 한번 만나는 것도 정상은 아니다. 그래 우리가 사는 곳은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실낙원이지!

 

오늘 독서로 읽은 아가는 전엔 처음부터 영성적인 저작물로 전제하고 그 틀에 맞게 억지춘향식으로 해석하였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남녀 간의 에로스를 건강한 관계로 인정하는 맥락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추세다. 여기서 잠깐 남자든 여자든 그 비율은 다르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지닌 여성성과 남성성의 차이점을 칼 구스타프 융을 통해 알아보자.

 

융의 어록

여성의 특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을 이루어내는 여성들은 그런 것이 여성의 본성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큰 예외에 속한다. 사물에의 사랑은 남성의 특권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그 본성 속에 융합하고 있으므로, 남성이 여성성을, 여성이 남성성을 살아낼 수 있다. 반대되는 성의 삶을 산다면, 자신의 성이 뒷전에 물러나서 본래적인 것이 덜 실현될 수 있다. 남성은 남성으로서, 여성은 여성으로서 살아야한다.

C.G. Jungpp. 39-40, 유럽의 여성, 기본저작집 9권

 

여성의 심리학은 묶고 푸는 데에 뛰어난 에로스의 원리를 근거로 하고 있다. 반면에 오래전부터 최고의 법칙으로서의 로고스는 남성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현대어로 에로스의 개념은 심혼의 관계, 로고스는 사실적인 관심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평범한 남성이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사랑은 본래적인 의미에 있어서 결혼제도와 일치하며 결혼의 저편에는 간통이나 구체적인 우정이 있는 반면, 여성에게는 결혼이 제도가 아니라 인간적이고 에로스적인 관계이다. 적어도 여성은 그렇다고 믿고 싶어 한다.

C.G. Jungp. 46, 유럽의 여성, 기본저작집 9권

 

종교의 가르침은 혼을 지나치게 오로지 신에게만 유보하고 그 점에서 인간은 손해를 보고 있다. 그러나 신 자신도 심혼이 영양실조에 걸린 인류 가운데에서는 번영할 수 없다. 이 굶주림에 대해 여성의 심혼이 반응한다. 로고스가 구별하고 해명하는 곳에서 에로스는 서로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현재의 여성 앞에는 막중한 문화과제가 놓여 있으며,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할 것이다.

C.G. Jungp. 58, 유럽의 여성, 기본저작집 9권

 

오늘 복음이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을 보면 융이 말하는 여성성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남성 제자들의 눈으로 막달레나의 행동을 보면 ‘대책이 없는 여인’ 일 것이다. 무덤을 막은 큰 바위를 치울 어떤 수단도 없이 그냥 맹목적적으로 무덤으로 가는 것도 그렇고 이미 다 끝났는데 시체에 향료를 바르려 하는 것도 그렇고…….그러나 남성성이라는 가치로 볼 때 전혀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이 전혀 다른 세상을 창조하기도 한다. 융의 말처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해서는 일방적인 로고스적 가치에 눌려 지내던 여성성의 발견과 회복이 요구된다.

 

여기서 부처님과 예수님이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 본다. 아시다시피 예수는 장례행렬을 멈추고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을 함께한다. 루카 7:12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위로하시며

14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부처님은 아들을 잃은 어미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냉혹한 사실을 스스로 보게 한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일 것 같다. 그리고 그에 따라 다른 세계가 창조된다. 나는 누구를 더 닮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