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돈오(頓悟)

by 후박나무 posted Aug 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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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라고도 하는 코헬렛은 이렇게 시작한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꼭 맛을 봐야 이물질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게 아니듯 인생을 다 살아보고서야 ‘허무로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세 때에 죽음을 깨닫고 삶의 허무를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 허무의 심연으로 빨려들지 않으려 힘겹게 허우적대며 20대 초반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서 무심코 바라보던 십자고상의 그림자가 나에게는 모세가 본 ‘불타는 떨기나무’가 되었다. 이제와 복기(復記)해보면 삶의 허무를 한 순간에 깨닫고 그토록 오랜 세월 허무에 잠겼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죽음을 이해하지 못할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가셨으니 아마도 나의 마음에는 깊은 충격이 있었을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친밀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체험은 그 후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맺거나 세상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30분 남짓 십자고상 앞에 머무를 때 일어난 일은 그냥 돈오(頓悟)와 같은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집착하고 있던 삶을 놓자, 삶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사라지는 순간 전혀 기대치도 않았던 새로운 생명을 덤으로 받는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덤으로 받았기에 고맙고 자유로웠던 생명도 시간이 지나니 다시 집착 하게 된다. 이론과는 달리 살만큼 살아 나이가 들면 미련이 없어질 것도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94년이던가. 베이징에서 비행기로 4시간 걸리는 우루무치에 간적이 있다. 비행기는 낡을 대로 낡은 소련제 일류신이었다. 비행도중 말로만 듣던 에어포킷이 있었다. 평온히 날아가던 비행기가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를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공기밀도가 낮은 곳을 통과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란다. 첫 번째 에어포킷때는 스튜어디스가 식사를 서빙 중이었는데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내식과 커피 잔이 날고 승무원은 넘어져 부상을 당하고……. 여인들은 울고……. 이렇게 어수선했는데 잠시 후 2번째 에어포킷으로 비행기가 또 수직으로 떨어졌을 때에는 오히려 기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간단히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며 짧은 기도를 바치고 담담할 수 있었다. 다행히 비행기는 더 이상의 사건 없이 우루무치 공항에 착륙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할 때 박수를 치는 민족이 이탈리아인들 외에 중국인들도 있음을 알았다. 그때는 담담했는데 오히려 더 오래 산 지금 죽음은 더 두렵다.

 

미국 최초의 조동종(曹洞宗) 선원인 타사하라 선원을 샌. 프란시스코에 설립해 일본 선을 서구에 전했던 스즈키 순류(鈴木俊降·1904~1971년) 선사는 위암으로 타계하셨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그의 친구 선사가 방문한 자리에서 스즈끼 선사는 이런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여보게 친구! 나는 아직 떠나고 싶지 않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