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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복음 사색

영성

by 후박나무 posted Oct 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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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의 가을 길을 걸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일본 교토의 ‘철학자의 길’ 도 함께 걷게 된다. 교토의 철학자의 길은 평탄하고 상당한 넓이의 시냇물이 옆을 흐르는데, 우이령의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이 정상까지 이어지고 시내 대신 얼음 밑을 흐르는 물소리처럼 돌돌거리는 물소리가 난다. 봄과 가을은 특별히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계절이다. 봄에 하루가 다르게 별처럼 반짝이는 움이 트고 연둣빛 잎이 퍼지며 숲에 살이 붙는 것이 보이듯, 가을 숲은 저마다 제 색깔을 드러내며 나름대로의 대미를 장식하고 온 곳으로 돌아간다. 마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계절 같다. 인생의 다른 계절에 같은 장소를 방문하고 쓴 글을 견주어 보면 나이가 듦에 따라 관점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 추이가 보이기도 한다.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란 책을 읽다가,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곧 정치이고,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면 우선 기존의 지배 사상이 주입한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는 구절이 눈에 들어오다. 그런 맥락에서 요즈음 프레임 전쟁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나보다. 새로운 영성이 탄생하려면 먼저 기존 종교가 고착화시킨 프레임을 알아차리고 벗어날 필요가 있다.

 

로마에서 공부할 때 다음과 같은 중국의 한 비교종교학자의 짧은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1991년). "중국의 한 비교종교학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중국인들은 특정한 하나의 종교를 선택하여 믿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가 곧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묻고 싶은 게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처럼 영원에 대한 갈망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종교현황을 보면 가톨릭뿐만 아니라 불교도 명색만 살아있지 그다지 충실한 신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사정은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이런 것을 보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영원에 대한 무의식적 갈망을 해소하는 다른 루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목요일까지 회의를 마치고 금요일은 교오토, 금요일은 오사카 성과 정원을 둘러보았다. 15년 전(1992년) 몇 달간 일본에 머물 때도 일본의 정원이라든가 유명한 절을 많이 보았었지만, 그리 좋은 인상은 없었고 그저 상당히 Artificial 하다는 반감이 있었다. 그동안 수도생활을 통해서 미적인 감각이 달라진 것인지 아니면 관상기도가 깊어지면서 다른 관점을 갖게 된 것인지 이번에는 상당히 달랐다.

 

이번(2007년) 교토 방문에서 특히 마음에 깊이 남는 것은 "Philosopher's Path" 이다. 천천히 걸어서 한 30분 정도 걸리는 산책길인데 아끼마 산의 발치에 나 있었다. 산책길 한편으로는 일본의 강이나 작은 내들이 다 그렇듯이 조금은 유속이 빠른 Stream 이 있었고. 그 길을 걸으면서 저는 2001년 버클리에서 안식년을 지낼 때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며칠 후면 학기가 끝나고 제각기 제나라로 돌아갈 것이기에 환송회를 했었다. 그때 프랑스에서 오셨던 한 노 수녀님(80세가 넘었지요, 아마) 이 이런 말씀을 하였었다.

 

Life is so beautiful, but it is too short! 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줄곧 떠올렸던 이미지는 바로 그 수녀님이 fare well party 석상에서 하셨던 그 이야기 이었다. 관광안내서에 나와 있던 니시따 기따로우라는 선불교 종교철학자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길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자가 되게 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걷는 오른쪽으로 좀 빠른 속도로 흐르는 Stream 자체도 세월이 유수와 같음을 보여주는데, 바람이 불때마다 그 위에 떨어져 흘러가는 가을 잎들은 저절로 인생의 무상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돌을 깐 길과 가을나무와 흐르는 시내 전체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그 분위기는 왜 그토록 아름다운 것인지! 일본의 전통적인 절과 정원, 길은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영원과 시간을 동시에 도드라지게 볼 수 있게 한다. 그래 진정 보게 되는 사람은 영원한 지금에 있게 된다. 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기도삼매에 들었을 때 느끼게 되는 "법열" 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15년 전과 달라진 것은 제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서 어떤 특정한 종파가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까닭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영원에 대한 갈망이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생활양식 속에서 충족되고 있어서인 듯하다. 중국인 종교학자의 말은 중국인들에게 해당되기보다는, 일본인들에게 해당되는 것 같고! 요즈음 젊은이와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특정 종교의 체제나 도그마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비교적 자유로운 영성자체로 보인다. 온 우주는 인간이 개인적인 범주의 상처나 트라우마를 넘고 무상도 넘어 우리의 의식이 우주의 자의식임을 깨닫는 ‘우주의식’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A River runs through it. 의 마지막 장면에서 맥클레인의 독백은 이런 영성을 어렴풋이 짐작케 해준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하느님의 현존에 드는 노만 맥클레인의 하느님 체험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더 큰 호소력을 갖는것 같다. 이 장면을 통해 다른 색깔의 하느님 체험을 음미해보자.

 

https://youtu.be/OsDnrFBpsBk

 

 

캐년 뒤로 지는 해, 마지막 빛줄기가 키 큰 나무사이로 들어와 강물에 반사되고, 자신의 황혼과 마주서듯 어스름에 낚시를 던지며 노만은 이 영화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다.

 

젊은 시절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갔다.

 

아내 제시도 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지금은 너무 늙어 어떤 친구들은 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거의 매일 낚시하러 이 강에 홀로 오곤 한다.

 

어스름이 깔리는 계곡의 흐르는 강물에 홀로 서 있노라면, 모든 존재는 사라지고 나의 영혼과 기억 그리고 빅 블랰풋 강이 흐르는 소리, 낚시를 던지는 4박자의 리듬, 고기가 물리길 바라는 바람만 남게 된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모든 것은 하나가 되고 강은 그 하나를 통하여 흐른다. 이때 우리의 의식은 작은 자아를 벗어나 우주의 자의식인 ‘우주의식’ 이 발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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