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박태원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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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달이 바뀌었다. 벚나무 잎도 거의 다 물들었다.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처음 가을을 지낸 것은 82년 이었다. 물들어가는 산을 보면서 “양지 녘에 섰던 나무가 단풍도 곱다” 는걸 알았다. 욥을 보며 새삼 사람에게 양지가 어디인지 묻게 된다. -
야생화
아침에 야생화 동영상을 선물 받았다. 야생화를 보니 최 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이 연상된다. 두메꽃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 -
천수(天壽)
긴 명절휴가가 끝나다. 일상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겠다. 지금보다 젊고 몸이 성했을 때는 명절연휴에 보통 지리산이나 설악산을 찾았었다. 말하자면 갈릴리 호수 저 건너편 한적한 곳으로 건너갔다. 왜 그랬었을까? 새삼 궁금해지다. 일상생활에서 만나야 ... -
마중물
오늘 잠언에서 하느님께 간청하는 두가지중 하나가 가슴에 와 닿는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 -
추석
어제에 이어 오늘도 청명한 날이다. 수도원 시간표는 명절이고 공휴일임을 감안하여 미사시간 외에는 여유 있게 조정했다. 요즈음 새벽공기는 서늘함을 넘어 한기가 느껴진다. 곧 추위라도 닥칠 기세다. 혹독하게 더웠던 8월부터 그동안 우이령 길에서 자주 만... -
씨와 씨 뿌리는 사람
모처럼 무리를 하여 강릉의 솔이를 만나 회포를 풀고 양양 수도원도 방문했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파김치처럼 처졌지만 다녀오기를 잘했다. 짧은 여행 1박2일 동안 가을장마라도 든 듯이 계속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화창하게 개어 푸른 하늘이 보인다. 이틀 ... -
지혜
오늘 복음에서 예수가 의도하는 것은 자신과 세자요한, 자신의 제자들과 세자요한의 제자들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들 마냥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그 세대 사람들의 우유부단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적인 표현이 잠언에도 보인다. 1:... -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루카에만 고유한 나인의 과부 아들 이야기는 루카복음사가가 특별히 주목하고 강조하고자 한 예수의 면모를 그린다. 예수는 단순히 비극적인 일에 슬퍼할 뿐만 아니라, 시선을 돌려 비탄에 젖어 있을 여인에게 따듯한 관심을 보이는 자상한 사람이었다(비슷한 ... -
忙中閑
2001년 안식년 후반기는 시카고 CTU에서 조직한 성서고고학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먼저 그리스와 터키를 답사하며 헬레니즘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예수가 살던 당시 사회에 영향을 주었는지 전이해를 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예루살렘에 본거지를 두고... -
거듭남
오늘은 십자가 현양축일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고등학교는 시작되지 않은 2월 어느 날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를 만났다. 그날 저녁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고교 2년까지 참 충실히 다녔었다. 고3이 되면서 교회 나가는 것을 중단했는데 ... -
寂靜
아마 88년이나 89년일 게다. 당시 한국의 고난회는 시카고 성. 십자가 관구의 지부였으므로 관구장인 세바스챤 신부가 방문하여 종신서원 자들과 개별면담을 했었다. 나는 그때 서울 명상의 집 피정지도자로 일할 때였으므로 과중한 업무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 -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이제는 새벽공기가 서늘한 게 아니라 써늘한 게 오싹케 한다. 긴팔을 입고 산책을 간다. 어제는 먼 광주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과연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아?(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먼데서 벗이 찾아오니 이것 또한 즐겁고 기쁘지 아니한가?) ... -
바르티메오
이탈리아의 작은 섬 칼라 디소토로 망명을 오게 된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 어부의 아들 마리오는 그의 도착으로 인해 불어난 우편물량을 소화하고자 집배원으로 고용된다. 마리오는 로맨틱 시인 네루다와 우정을 쌓아가면서 시와 은유의 세계를 만나... -
여름의 끝
어제 문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평양에 간 특사 일행이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늦어도 올해 안에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등이 성사되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으면 좋겠다. 요즈음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
聖召
오늘 복음은 ‘부르심’에 관한 것이다. 누구든 베드로처럼 갑자기 성스러운 곳에 서게 되면 이내 자신의 부적합함 혹은 부당함을 십분 깨닫게 되어 그 자리를 피하고자 함이 人之常情 이다. 프란체스코 교황도 자신의 부르심을 회상할 때 당신의 부당함을 깊... -
Those were the days
몇 일간 몸이 많이 불편했다. 환절기 탓인지 궂은 날씨탓인지……. 오늘은 몸도 마음도 청명한 하늘처럼 맑다. 나무그늘 사이로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우이령을 넘어 오봉 전망대까지 다녀오다. 벚나무 잎이 물들어가고 서늘한 바람이 숲을 스칠 때면 후드득 하... -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깊은 강물을 건너니 내 혼이 깊어졌다“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깊은 강물을 건너니 내 혼이 깊어졌다“ 이와 반대되는 맥락에서 ‘본데없이 자라다’ 란 말이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임 여성 1인당 출산율은 세계 최저인 1.08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6명보다 현저... -
추천고 새마비(秋天高 塞馬肥)
근 한주일 만에 우이령을 넘어 오봉전망대까지 다녀오다. 그동안 연일 계속된 태풍과 호우로 힘들었다. 9월을 시작하는 첫날인 오늘은 푸르고 높은 하늘에 햇살이 빛나고 서늘한 바람이 이는 게 전형적인 천고마비(天高馬肥) 의 계절이다. 원래 이 말은 추천고... -
빠루시아
6년 만에 우리나라를 관통하며 커다란 피해를 입히리라 예상되어 긴장하고 숨죽이며 주의를 기울이던 태풍 솔릭은 싱겁게 지나가고, 오히려 그 후에 찾아온 게릴라성 호우가 국지적으로 예상치 못한 많은 피해를 입혔다. 오늘이 8월의 마지막 날, 그렇게 여... -
장터목
세자요한이 헤로디아의 간계와 헤롯의 체면을 위해 생명을 잃는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세자요한의 삶이 너무 빈한해진다. 자기 소신껏 살다 그 소신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https://youtu.be/YTHzg0GPGG0 1985년 개천절 연휴에 나는 혼자 지리산 종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