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처음 대학 강단에 서기까지 나에게도 많은 은사들이 계셨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최근의 은사중 한 분인 레슬리 교수가 자주 떠오른다. 왜 그런지는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다. CTU에서 조직했던 예루살렘 성서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벤구리온, 프랑크푸르트 경유 시카고로 떠나기 전 11월 초의 어느 날 자정 즈음에 마무리하는 감사미사를 드렸다. 이 미사주례를 한 레슬리 교수의 강론이 마음에 깊이 남았기에 자주 되뇌게 된다.
“남들에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히브리어 희랍어 사전, 문법책, 주석서, 논문, 컴퓨터 등은 내가 하느님을 섬기는 도구이며, 나는 이것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을 섬긴다. 그러므로 책상은 나의 제대이다.” 이런 취지의 강론으로 자신의 성소를 나눴던 레슬리 교수는 성서중에서도 신명기계 문헌을 “과거에 있었던 일을 오늘과 내일을 위한 교훈으로 만든 것” 으로 이해했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란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 만나고 헤어지며 겪는 여러 우여곡절을 표현하는 원초경험중 하나가 아닐까?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사회의 최소단위라는 가정이 갖는 원초적 한계와 상황을 설화의 형태로 이야기한다. 10장까지 설화 형태로 전개되던 창세기는 11장의 바벨탑과 족보에 이어 12장부터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가정사로 이어진다. 성서저자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파란만장한 가정사가 곧 세계사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아담과 이브의 프로토타입(prototype) 가정이 가진 한계와 명암이 구체적인 역사에 어떻게 육화되는지 보여주며, 인류에게는 구원과 은총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여준다.
인간은 진흙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옹기를 빚어가지만 날이 갈수록 오히려 금만 무수히 가는 옹기를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금을 통해서만 빛이 스며듦을 이해하게 될 때 그는 구원되고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정이 회복되고 사회는 하느님 나라에 근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