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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복음 사색

약속(約束)

by 후박나무 posted Jul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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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유학시절 본원에서 공부하던 학생신부 중에 바스크 출신의 부제가 있었다. 어느 날 한 달 영신수련을 하러 간다고 해서, 한국에서는 종신서원하기 전까지 2번 한다고 하니, 요한 밥띠스따 부제가 장난을 쳤다. 2번이나 하고서도 그 모양이냐고? 웃으면서 2번이나 했기에 이 정도라도 됐다고 응수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2 번의 한달 피정을 하고서도 정(靜)에 드는 법이랄까 관상기도(觀相祈禱) 의 맛을 몰랐었다. 서품후 전남 두륜산 대흥사의 암자 상원암에서 왕인(王忍) 스님 밑에서 한 달간 선(禪)을 행한 후에야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할까! 하루 2시간씩 4번 8시간, 이렇게 3년을 해야 비로소 좌선(坐禪)을 배웠다 하고, 그 후 동선(動禪)을 한다고 했다. 병이 나기 전에는 주로 좌선형태로 정좌하고 기도했었는데, 이제는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굳고 저리니 어쩔 수 없이 동선을 하게 된다. 마리아나 마르타나 살아가면서 상황에 맞게 능소능대(能小能大)해야 되리라.

 

아브람이 야훼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브람이 야훼의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상기시키자 야훼 하느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아브람 정도의 나이가 되면 야훼 하느님의 터무니없는 약속을 믿기보다 이런 시를 읊음이 마땅하고 옳은 일 일 것 같기도 하다.

 

늙어가는 길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 두리번 찾아 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 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아름답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스코틀랜드 어느 양로원 할머니의 시>

 

아브람을 여느 노인과 다른 노인으로 만든 것은 하느님의 약속(約束)이며, 그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었다. 나의 부르심을 다시 찬찬히 돌아본다.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약속을 하셨던가? 아 있다! 그렇게 선명하고 감동적으로 울려왔던 그 약속의 말씀을 이렇게 잊고 살수도 있는 거구나! 참 사람에겐 무엇이나 가능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녕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이 나에게 하신 약속(約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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