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by 후박나무 posted Apr 1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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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올해 들어 처음 중고교 동창들을 만났다. 항상 내가 있던 양양이나 서울에서도 외진 변두리 우이동까지 찾아 왔다가 다시 먼 거리를 돌아가는 게 미안해 이번엔 내가 돈암동까지 나갔다. 담소를 하며 반주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하다 보니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나도 무리를 했는지 몹시 지쳤다. 사람은 시간을 양으로만이 아니라 질로도 느낀다.

 

시간의 이러한 이원적 개념은 카이로스 kairos 와 크로노스 chronos 라는 그리스어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크로놀로지 chronology 라는 단어에서 나온 크로노스는 측정가능한 자원으로서의 시간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카이로스는 기회의 순간 또는 적절한 결정적인 때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종종 하느님의 시간이라고 일컬어진다. 이처럼 시간은 종종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체험된다. 시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는가 하면 1초가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 가끔씩 시간이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예수와 제자, 혹은 니코데모나 군중과 대화를 할 때 서로 다른 세계나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기에 동문서답이나 선문답같이 들리는 것이다. 오늘 복음만 해도 군중들이 당연히 전제하고 있는 시간은 크로노스인데 반해 예수님은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말하는 것 같다. 생각이나 사고(思考)의 소음이 점차 멀어지고 하느님을 둘러싼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서 소위 존재의 바탕(Ground of Being) 에 근접하게 된다. 심재를 거쳐 좌망(坐忘)이라 불리는 이 차원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음만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종교의 역사는 기껏해야 오천년이지만 영성의 역사는 인류의 기원과 함께 한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난 때는 종교적 역사에 속하는 시간인데 반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특정한 종교로 정형화 되기 훨씬 이전부터 “있음”의 체험이 선재했다는 말씀이 아닐까! 여기서도 군중들은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묻고 예수님은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대답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