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색

메리놀회의 백 랄프 수사님!

by 후박나무 posted Jun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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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성심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베드로, 바오로 대축일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거룩하다는 것은 어떻다는 것일까? 보통 영어로 Sacred Heart 로 표기되는데, 거룩하다는 의미의 Holy 와 Health, Whole 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그러니까 거룩하다는 것은 파편적인 한부분만이 아닌 전체이므로 두루 보편적으로 건전한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예수의 면모는 그가 자주 병든 사람이나, 목자 없는 양같은 백성들을 가엾이,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이다. 번역을 점잖게 해서 그러지 본래의 뜻은 이보다 훨씬 강해서, 그들을 보고 가엾이 여긴 정도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애가 끊어지듯 아팠던 것이다. 예수가 율법이란 대의명분 뒤에 숨어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던 당대의 종교지도자와 달리 인간이 정한 테두리를 뛰어넘어 사람을 우선시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너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 때문이다. 사람을 오른쪽 왼쪽으로 갈라놓는 최후의 심판에서도 예수는 병든 이, 가난한 이, 감옥에 갇힌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마음이란 야훼 하느님의 특성인 헤셑과 비슷하다. 아파하는 사람과 같이 아파하며, 억울한 일을 당한이의 한을 풀어주려는 마음.

 

나는 이제 나이로는 인생의 4계중 초겨울에 들어선 셈이나 노화가 빨리 진행되는 병으로 인해 초겨울을 한참 지났을 수도 있다. 예수고난회의 외부 지원자로 월계동의 마도로스 양말 공장에 3달 다닌 후 청주의 경로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시설인 성심원에서 일했었다. 나름 분주한 하루 일과를 마치면 성심원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에 오르곤 했다. 그곳에서의 일은 아마 2월에 시작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을 마치고 늘 가던 야산에는 양로원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묘지가 있었다.

 

서산에 지는 붉은 해를 보며 무덤사이를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드렸었다.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묘지에 갔는데 마리아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새로 조성된 봉분에- 우산을 씌우고 당신은 비를 맞고 계셨다. 말을 건네다보니, 엊그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비를 맞아 추우실까봐 나오셨다는 것이다. 부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마음속에 어렴풋이 그려졌다.

 

성심원에서 잊지 못할 사람도 만났다. 미국인으로 2차 세계대전때 조종사로 종군하고 전후 메리놀 회에 입회하여 한국에 오신 백 랄프 수사님이 그분이다. 랄프 수사님은 나보다 먼저 한국에 오셨다. 야산에 조성된 공동묘지는 사각형으로 열을 지어있었고, 커다란 야외제대가 무덤을 마주보며 앞에 있었다. 그리고 제대 뒤에는 화관을 들고 서 있는 천사가 있었다. 오늘 독서인 디모테오서를 형상화 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하면서,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하루는 해질녘 평소처럼 그 묘지를 거닐며 묵주기도를 하고 있는데 백 수사님이 올라 오셨다. 한국말을 잘 못하시던 백 수사님은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묘지 가운데로 똑바로 난 길을 가리키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살아가다보면 여기저기서 귀를 솔깃하게 하는 소리가 많이 들려올 거다. 그런 것에 기웃거리지 말고 제대에 이르는 이 길을 똑바로 가서, 천사가 들고 있는 화관을 받으라고.

 

나이 70이 훌쩍 넘은 몸으로 타국 땅에서 수도생활을 마무리 해 가시던 수사님이 이제 막 그 생활을 시작하려는 저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드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제 그 나이에 가까워지니 알 것도 같다. 백 수사님이나 사도 베드로, 바오로는 정말 한눈 팔지 않고 그 길을 똑바로 갔을까? 베드로나 바오로 사도는 모르겠지만 백 수사님이나 나는 분명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넷째왕의 전설에 나오는 주인공이 온갖 엄한 곳을 다 돌아다니게 되지만, 그가 비끌어져 갔던 곳이 실은 별을 따른것이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방황도 거쳐야 할 과정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백 수사님은 내가 성심원을 떠난 뒤 몇 년을 더 계시다가 알츠하이머 병으로 본국에 돌아가셔서 선종하셨다. 참 단순하고 선하신 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