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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복음 사색

聖召

by 후박나무 posted Sep 0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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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부르심’에 관한 것이다. 누구든 베드로처럼 갑자기 성스러운 곳에 서게 되면 이내 자신의 부적합함 혹은 부당함을 십분 깨닫게 되어 그 자리를 피하고자 함이 人之常情 이다. 프란체스코 교황도 자신의 부르심을 회상할 때 당신의 부당함을 깊이 느끼셨던 것 같다. 교황님의 모토가 miserando atque eligendo – 불쌍히 여기시어 부르셨다- 이기 때문이다. 잘 나서 뽑힌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로이 부르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한 결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새 출발, 새 삶을 시작했다는 의미 같다.

 

Gran Blue(그랑 블루) 라는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 이 되라는 보편적인 성소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자끄 마욜, 주인공은 홀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자라다 7-8세 남짓 될 때 아버지마저 잃는다. 그리고는 더욱 외롭게 홀로 삶을 이어간다. 그에게 유일한 삶의 의미는 바다밖에 없었다.

 

물위의 현실세계보다는 더 많은 의미가 바다 속에 있었을 거다. 거기서는 아무도 그를 왕따 시키거나, 여러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재지 않았을 테니까. 나름대로의 친구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고. 적어도 그곳에서 그는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살 수 있었다. 돌고래라는 친구, 적막이라는 안온함. 바다 속은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상처를 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는 지상의 세계에서는 나비의 꿈을 꾼 장자처럼 살아간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나비인데 지금 장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양. 현실에서는 생존키 위한 최소한의 적응만 하면서 그는 실상 바다 속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인간에의 길이 시작된다. Individuation(개성화) 이라 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전혀 개발되지 않았던 관계의 차원인 나와 너의 차원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 여인의 관심과 사랑이 그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그때껏 외롭게 살았기에, 외로운 생활양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외로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의 세계는 바다 속의 적막함과 돌고래 물고기와 나누는 나름의 우정이 전부였다. 따뜻한 관심을 받아본 그는 이제 비로소 외로움을 느낀다.

 

비유하자면 종교의 세계, 기도의 세계, 책의 세계 같이 침잠한 삶은 쟈끄 마욜에게 바다 속과 같다. 자끄 마욜이 가족사진이라고 내미는 한 장의 사진에는 우습게도 돌고래가 찍혀 있었다.

 

자끄 마욜이 물 밖에서 사는 것을 배웠지만, 사람들과 사는 것을 배웠지만 그에겐 사실 바다 속이 더 편한 것도 사실이다. 잠수부인 쟈끄는 잠수할 때 마다 “물 밖으로 나가야 할 이유를 찾기가 가장 어려웠다” 고 독백한다. 하나의 세계밖에 모르던 그는 이제 두 세계를 체험 하게 되고 마침내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선택의 때가 다가온다.

 

부르심은 보통 그가 살던 세계, 자신에게 익숙한 심리적, 물리적인 자신만의 세계와 결별하고 거기서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라는 초대인가 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부터 작금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까지 응답을 요구하는 압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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