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박태원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복음 사색

忙中閑

by 후박나무 posted Sep 16,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01년 안식년 후반기는 시카고 CTU에서 조직한 성서고고학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먼저 그리스와 터키를 답사하며 헬레니즘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예수가 살던 당시 사회에 영향을 주었는지 전이해를 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예루살렘에 본거지를 두고 갈릴레아와 골란고원, 가파르나움 등은 물론 요르단과 이집트등 주변국들의 성서사적지를 방문하며 현장수업을 병행했었다. 추석이 가까워지는 바로 이즈음에 우리 일행은 카이사리아 필립비를 방문하게 되었다. 단에 가까운 이 지역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냇물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크고 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은 스트림을 본 것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이어지는 요르단 상류를 제외하곤 이스라엘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당시 나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이런 시원한 물가에 앉아 ‘忙中閑’을 즐기며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묻지 않았을까 상상했었다.

 

옥계 천주교회로 부임하기전 돈암동 수도원에 있을 때 ‘호치민 평전’을 읽었다. 베트남이 일본과 더불어 우리와 같은 극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 속하는지도 그때 알았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월남도 중국의 과거제도를 수입해 운영한 나라다. 호치민도 처음에는 과거에 급제를 목표로 유교의 경전인 4서 3경을 공부했다.

 

유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유교의 이념을 담은 경전을 연구하고 그 가르침을 내면화한 정도를 테스트하여 국가의 관리로 등용하고 이들을 통해 대동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가톨릭교회에서도 동일한 것 같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연구하고 내면화 한 이들을 성직자로 선발하고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을 먹이고 가르쳐 하느님 나라의 구현을 꾀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이란 게송이 말하듯 문자에 국한되지 않고 문자를 너머선 의미를 터득해야함은 禪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유교나 가톨릭의 가르침에도 해당된다.

 

작년 이명박근혜 정권의 말기에 한국인들이 자주 한 말은 “이게 나라냐?” 이었다 한다. 그리고 지금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려 그간 쌓여왔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의 신자들도 물을 수 있겠다. ‘이게 하느님 나라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는 예수님의 물음에 오늘을 사는 대다수의 교우들의 대답은 이럴 것 같다. 입신양명과 무병장수를 보증하고 담보하는 보험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란 질문에 나는 이런 답도 했다. “세상은 더도 덜도 없이, 내가 변한 만큼만 변함”을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신 분.  


  1. 물처럼 바람처럼

    지난 토요일 밤 10시경 동기인 마티아 수사의 어머님이 선종하셨다. 3주전부터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갑작스럽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고를 듣게 되는 마음은 헛헛하다.   평생을 동굴에서 한 방향만 보도록 묶여 생활한다는 플라톤의 비유...
    Date2019.04.29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51
    Read More
  2. 성. 토마스 기념성당

    아마 90년대 후반 즈음일 터……. 인도의 방갈로에서 회의를 마친 후 마 신부님이 사목하시는 남부의 코친에 들렀었다. 그때가 나로서는 3번째 인도 방문이었다. 뭐 흔히 하는 말로 인도를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고. 그만큼 매...
    Date2019.04.28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87
    Read More
  3. 교도소

    어제 치과에서 의치를 만드느라 한 시간 가까이 이를 갈아댄 여파인지 어쩐지 오늘은 새벽 1시에 깨어 꼬빡 밤을 새었다. 요한 23세 께서는 당신의 만년 저널에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태어나기에도 죽기에도 좋은 날이다” 하셨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
    Date2019.04.26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82
    Read More
  4. 정지용의 '고향'

    예년보다 거의 일주일이나 빨리 온 더위로 꽃들이 절기에 맞게 순서대로 피는 게 아니라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피고 바쁘게 져 버린다. 꽃들도 마치 ‘바쁘다 바빠’ 하는 듯하다. 오늘 아침 미사후 거의 2주 만에 우이령을 오르다. 우이령은 그래도 높이가 있어 ...
    Date2019.04.24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47
    Read More
  5. '갈릴레아로 가서 다시 시작하라!

    한 주간이 조금 넘게 광주 수도원에 머물다 오다. 그동안 성. 삼일 전례와 연례피정 강사도 하고! 아무리 KTX를 타고 다닌다 해도 여행은 여행인가보다. 차를 타는 시간은 단축될지라도 몸이 받는 피로감은 동일한 것 같다. 21일 상경한 후 22일 다시 아산병원...
    Date2019.04.23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97
    Read More
  6. 엑서더스

    이집트의 은수자 바오로라는 내 영세명처럼 두메꽃으로 살고자 수도원에 왔는데, 어째 이곳이 산 아래 저자거리보다 더 번다하다. 꽃이야 어디에 피든 누구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을 표현하니 모든 꽃이 두메꽃임은 알겠다. 저자거리...
    Date2019.04.20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75
    Read More
  7. 성 금요일

    https://youtu.be/fcWo1hKHu40   오늘 성 금요일 십자가 경배는 "Miserere mei, Deus"를 들으며 시작했다. Gregorio Allegri(1582-1652) 가 다윗의 참회시인 시편 51에 곡을 붙인 것으로서, 성주간 동안 시스티나 성당에서 5부 아카펠라 합창단이 부르는 성가...
    Date2019.04.19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61
    Read More
  8.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과 이명박의 '대통령의 시간'

    20대 전반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었다. 페이지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던 그 용기와 진실성에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동시에 나는 아마 나이 들어서도 평생 ‘고백록’ 이라든가 ‘회고록’ 혹은 ‘자서전’ 은 못쓸 거라는 ...
    Date2019.04.17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73
    Read More
  9. 날카로운 화살

    나는 Man of Letters 로서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충격적인 체험을 하필이면 도서관에서 했다.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책과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으니 도서관이 그런 체험을 할 확률이 높은 곳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대학 1학년 때...
    Date2019.04.16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797
    Read More
  10. 등잔 밑

    광주에 도착한 토요일에는 수도원에서 자고, 어제 명상의 집으로 내려오다. 만개했던 벚꽃이 지고 있다. 진달래, 개나리 등은 벌써 졌고 영산홍이 몽우리를 터뜨리고 있다. 직시를 많이 한 덕에 라일락과 영산홍이 전처럼 나를 흔들진 못한다.   자격지심(自激...
    Date2019.04.15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34
    Read More
  11. 나귀

    어제 ktx로 광주수도원에 오다. 진이 빠지는 어려운 여행이었다. 비는 오지 않고 꾸물거리던 날씨도 한 몫을 더하다. 송정에서 광주 수도원까지는 승용차를 이용했는데 몸과 마음에 긴장을 배가 시켰다. 승객을 신속하면서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하고 승객의 입...
    Date2019.04.14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70
    Read More
  12.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어제 저녁 올해 들어 처음 중고교 동창들을 만났다. 항상 내가 있던 양양이나 서울에서도 외진 변두리 우이동까지 찾아 왔다가 다시 먼 거리를 돌아가는 게 미안해 이번엔 내가 돈암동까지 나갔다. 담소를 하며 반주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하다 보니 세 시간이 ...
    Date2019.04.11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85
    Read More
  13. Sensus plenior

    화사하게 피었던 목련(木蓮) 도 비바람에 색이 바래 아롱아롱 지고 있다. 누구는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했었지. 나무에 핀 연꽃도 온 산을 물들인 진달래도 이렇게 봄날이 가고 있음을 알린다. 그나저나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빗소리...
    Date2019.04.09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67
    Read More
  14. 창조되지 않은 빛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일상으로 체험하는 창조된 빛과 창조되지 않은 빛을 엄밀히 구분한다.  후자에 대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더라도 나는 결국 자신의 체험밖에 ...
    Date2019.04.08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47
    Read More
  15. vorverständnis [전이해(前理解)]

    사지에 힘이 없고 물먹은 솜처럼 몸이 자꾸 땅에 눌어붙는 것 같아 어제는 마사지도 받았다. 요 며칠 몸이 많이 불편하여 오늘 미사주례도 부담이 되었는데, 공진단 덕분에 지친 모습 보이지 않고 잘 마쳤다.   오늘은 새벽 3시에 깨어 더 이상 잠이 안와 노느...
    Date2019.04.07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492
    Read More
  16. 산불

    어제 식목일에 새벽부터 동해안 산불소식으로 마음이 울렁거렸다. 마음이 뒤숭숭하여 알아보니 양양수도원과 솔이네는 안전하단다. 잠시 인연을 맺었던 옥계에서는 80 여 채가 전소되었다 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자연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는 때다.   ...
    Date2019.04.06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38
    Read More
  17. 낯선 길을 가는 소경

    어제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도봉 도서관에 들려 책구경을 했는데 “PURPOSE DRIVEN LIFE” (목적이 이끄는 삶) 이란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내 삶이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고 있다기 보다는 가끔씩 표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
    Date2019.04.04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73
    Read More
  18. 감수성

    솔이 에게 나의 체취가 밴 스웨터랑 츄리닝 바지를 택배로 보냈다. 솔이가 집안에서 잘 때 눕는 잠자리에 내 옷을 펼쳐 놓으니 냉큼 옷 위에 엎드려 코를 박고는 꼼짝도 않더란다. 평소 길 냥이 소리만 나도 흥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던 녀석이, 밥달라...
    Date2019.04.02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65
    Read More
  19. 하느님의 말씀

    돌아보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 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시편이나 말씀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믿는다. 마음에 와 닿기에 자연히 기억하게 된 시편귀절이나 말씀들은 위기나 결단의 순간에 디...
    Date2019.04.01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58
    Read More
  20. 심재(心齋), 좌망(坐忘), 조철(朝澈)

    처음으로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뚫고 들어와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성서의 말씀은 마태오 복음 5장의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 이었다. 그 말씀이 씨가 되어 말씀과 만난 그날부터 크리스천이 되었고 이어 수도생활을 ...
    Date2019.03.31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357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97 Next
/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