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음악을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 ’ 중에서 (https://youtu.be/IejW2zBgnGA) 2분 30초부터의 장면 -호수에 누운 베토벤이 별이 되는- 은 같은 사물이라도 관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이해도 세월의 추이와 원근에 따라 두 개의 다른 그림으로 그려진다. 하나는 다마스쿠스로 가든 길에 있었던 극적인 회심장면이고(사도행전 9:3~19),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을 바꿔버린 회심에 대해 오랜 세월 숙고한 후의 그림이다. 후자(갈라 1:17) 에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상에서의 극적인 사건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고, 그 대신 하느님은 심지어 그가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되기 이전부터 자신을 부르셨다는 섭리에 대한 자각이 주를 이룬다.
우리들의 성소에 대한 이해도 같은 패턴을 따른다. 젊었던 시절, 부르심을 받던 당시에는 사도 바오로의 체험에 못지않은 극적이고 절묘한 사건도 많았다. 그야말로 로마서 8:28“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여름 매미는 가을을 모르는 법”, 빛나는 젊음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듯, 의미와 보람이 넘치던 부르심도 다른 색조를 띄게 된다. 사도 바오로가 그런 풍상을 다 겪은 후에 더 넓은 섭리 속에 자신의 부르심을 놓고 보았듯, 우리도 그리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게 된 이런저런 직간접적인 요인이 많았겠지만, 복음사가 요한은 오랜 숙고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가야파의 입을 빌어,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