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로마를 다녀온 지인이 Grappa를 한 병 가져오셨다. 그랍빠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식후 소화를 위해 마시는 디저트로 보통 40도가 넘는 독하면서도 향이 강하고 달콤한 술이다. 하지만 한국인, 그가 누구인가? 한 잔 마시고 회가 동한 세 사람은 한 병을 바닥내고 추가로 한 병 더 바닥을 보고서 급기야는 필름이 끊겼다고 ㅠㅠ
그랍빠하니 바랍빠가……. 도스토옙스키처럼 사형집행 직전에 예수님 덕분으로 목숨을 구했던 사람. 1951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구사일생으로 다시 살아난 바랍빠는 기성사회에 대한 거부와 반항으로 살인, 방화를 일삼던 옛 삶으로 돌아간다. 언뜻 보면 '믿지 않는 자'가 지난한 과정 끝에 마침내 '믿는 자'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중의 소외를 그리는 것 같다. 바랍빠가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존재에 대해 알고자 할 때 예수를 믿는 이들은 그를 경멸하고 외면한다. 소위 예수를 정통으로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과 같은 부류에겐 형제적 사랑을 베풀었지만 의심하고 주저하는 바랍빠, 더욱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의심되는 그를 경원시하고 멸시했다. 바랍빠는 기성사회로 부터는 물론 대안사회를 꿈꾸던 사람들로부터도 이중으로 소외되어 더욱 고독해진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폐쇄된 믿음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바랍빠가 오히려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면서도 의연히 죽음을 택한 그 놀라운 행위에 대한 소박하고 절실한 의문, 그리고 언청이 여인과 사하키가 보여준 믿음으로써 고난에 찬 삶을 긍정하는 힘 때문이었으리라. 바랍빠는 내면에 강인한 믿음과 의지를 가진 이들이 보여주는 보잘 것 없지만 거룩한 행위에 경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할 수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행위로 그들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감을 씻고자 했다. 그 결과 기성사회나 대안을 꿈꾸는 사람들, 양편의 멸시 속에 십자가에 달린 그는 마지막으로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며 숨을 거둔다.
하느님 빼고는 없는 것이 없는 “당신들의 천국”에 사는 사람들도 “내 사랑 안에 머문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기선 살아계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아마 성소가 없다고, 바랍빠처럼 내쳐질 것 같다.
박태원 가브리엘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