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선자령에 다녀오다. 그러잖아도 봄 산은 얼었던 땅이 녹아 등산로가 진창이기 쉬운데 전일 비까지 내려 아주 힘든 산행을 하다. 그렇게 몸을 힘들게 하니 여러 날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시름이 수면 아래로 잠시 가라앉더라.
원하든 원치 않던 떠나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분적으로나마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지속할 수도 지속될 수도 없어 떠나는 거니까! 남은 사람은 허망함에 더해 자신의 삶까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 테고.
30 여 년 전 한국고난회 지부 대표로 관구총회 참석후 미국전역의 고난회 수도원을 방문했다. L. A 시에라 마드레, 샌. 프란시스코, 사끄라멘토, 디트로이트, 시카고, 루이 빌, 세인트 루이스, 뉴욕, 워싱턴 DC, 휴스턴, 하와이등. 가는데 마다 양로원이던 수도원을 보면서 나의 미래를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나도 그때 그 할아버지 신부님들의 연배에 다가서면서 당시의 상황이 데자뷔 된다.
그들도 나 같이 젊어서 청운의 꿈을 품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희망에 부풀어 나섰겠지. 이제 자신들의 생활과 일을 이어나갈 후배 하나 없이 자기들끼리 늙어가던 그 할아버지들은 당신들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나가실까? 그것은 이제 내가 답해야 하는 나의 절박함이 되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내게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사람 외엔 모른다” 는 말로 들린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표현해낼 수 도 없을뿐더러, 그럴 수 있다하더라도 다 까발리지는 않는 법이다. 그때 그 할아버지 신부님들의 응답에도, 나의 응답에도 그런 면이 포함될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Sacrifice, 희생”에서 근사치를 본다.
박태원 가브리엘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