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영보 대축일이다. 구원이 시작된 날이라는 의례적인 축하의 인사대신 마리아의 말 못할 아픔에 마음이 간다. 보통 사순절에 영보축일을 지내게 되는 것도 그렇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동시대를 어렵게 살아나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꽂힌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처럼 나라도 수도자도 그것을 어쩌지는 못한다. Passionist 의 Passion 은 Compassion 임을 수긍하며 기도로 동참한다. 그것도 상당히 아프다.
Philokalia에서 아티클 몇 개를 읽는다. 언제나처럼 교부들의 강론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심원한 통찰을 succint(간단명료) 하게 제시한다.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행간에 암시되므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겐 큰 만족감을 준다.
이런 독서와 공부는 분명 가치있는 것이긴 하지만, 분명 아주 소수의 사람들과 좁은 범주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는 걸까? 하는 의문도 피할 수는 없다. 한편 반야심경의 형이상학적 지혜가 극동아시아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함을 부인할 수 없듯이, 필로칼리아의 영성이 중세유럽 그리스도교 문명의 근간을 이뤘음도 확실하다.
다만 달라져야할 우리의 성소는 단순했던 중세 수도자들의 성소와는 다르게, 더 넓고 복잡하게 변한 사회현실 속에서 성서나 교부들의 문헌을 읽어야 하는 것이겠다. 미친 전세 값으로 비바람을 피할 공간조차 위협받는 상황에서 교부들의 문헌은 사뭇 다른 의미를 던져줄 것이다.
박태원 가브리엘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