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는 책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문자의 사람들인 그리스도교인 들은 人生歷程의 의미를, 과거 典範을 기록한 성서를 가이드라인 삼아 찾는다. 전통적으로 목요일은 그리스도교인 들이 자신의 聖召를 기억하는 날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한 인간이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과 같다. 이 만남이 있기 전까지는 머리로 아는 하느님으로서 욥이나(욥 42:5) 사마리아 사람(요한 4:42)들과 같이 풍문으로 듣고 아는 하느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사무엘의 부르심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꽤 오랜 기간 하느님의 집에 살았지만 부르심을 듣기 전 까지 하느님을 아지 못했던 것이다(1사무엘 3:1~9).
모세, 예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사도들의 수많은 소명사화가 지닌공통점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만난 후 미션을 수여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 만난다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 성소를 알게 되는 것이다. 중3때 처음 마태오 복음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거의 10여년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 체험이랄까, 부활체험 혹은 거듭나는 체험을 하고 성소를 알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맛본 사람으로 그것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나의 일이라 믿었고, 나름 그 일을 해왔다.
문화혁명으로 피폐했던 중국을 개방, 개혁으로 이끈 강력한 지도자 등 소평의 유명한 말처럼 흰 고양인지 검은 고양인지 가릴 필요 없이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좀 더 형이상학적인 인생고든, 생활에서 오는 민생고등 둘 다 인간의 고통이며, 그 앞에서 중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는 이제껏 인생고만 알았지 민생고를 잘 아지 못했다. 하지만 삼포세대를 지나 오포세대인 세상은 영원한 생명보다는 지금 당장 사는 게 더 문제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역할의 분담도 필요하다. 종교가 정치의 영역과 구분되면서도 민생고가 만연한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정의구현사제단 신임대표 김인국 신부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다만 그 안에서 한 점 불빛이기를 바랍니다. 힘겹고 고달픈 사람들 곁에 있으면서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지 않도록 옆에 있는 일이죠. 중요한 것은 더 많이 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도 교회와 함께 더 많이 울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각자를 부르심으로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서 사람을 변화시키듯이, 우리도 소외된 계층의 구체적인 사람, 가정과 교류가 없다면, 풍문으로 하느님을 아는 것 같이 될 것이다.
金樽美酒 千人血 (금준미주 천인혈) 玉盤佳肴 萬姓膏 (옥반가효 만성고) 燭淚落時 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 歌聲高處 怨聲高 (가성고처 원성고)
- 계서 성이성(溪書 成以性, 1595~1664)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대에서 떨어지는 촛농에 백성이 눈물 흘리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 높더라
박태원 가브리엘 C.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