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마태오, 루까복음 등의 공관복음에 비해 현저히 다른 관점을 가졌기에 요한의 예수이야기는 이단적인 복음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공관복음의 예수는 비유라는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지금껏 통용되던 사회적 통념이나 기존질서에 내포된 모순을 드러내며 새로운 질서나 가치를 제시하여 사탄의 나라를 대치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이곳에 현존케 하려하는데 반해, 요한이 전하는 예수는 아주 쉽게 땅위를 걸어 다닌 하느님으로서 천상의 계시를 일방적으로 선포하며 이를 믿는 이들은 다른 세상에 거하게 됨을 강변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크로산은 신화와 비유를 이렇게 구분한다.
신화는 누가 봐도 뚜렷하게 보이는 현 체제의 모순을 당연시하고 그 불의한 기존질서 속에서 성공하는 이야기인데 반해, 비유란 작금의 현실에 누적된 적폐를 폭로하여 그 지반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질서와 가치를 주창한다. 이명박의 성공신화를 대입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요한복음이 모 아니면 도란 식으로 너무도 분명하게 이원론적으로 세상을 제단 하는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예수사후 그들이 겪었던 역사적 비극에 기인하는바 클 것이다. 서기 70년 유다의 1차, 2차 독립전쟁이 로마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무위로 돌아간 후 차마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못한 가치와 질서, 염원을 포기하지 못하고 많은 부분이 소위 정신승리와 같은 차원으로 옮아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유행했던 사명당 설화와 유사점이 있다. 그러기에 성급하고 일방적인 영성화는 현실도피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구약성서를 관통하는 2가지 큰 흐름은 신비가-예언자(모세 시나이) 전승과 다윗-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왕조신학이다. 북 이스라엘 왕국은 전자의 영향이, 남유다왕국에서는 권위가 제도에 의해 부여되는 후자의 영향이 컸다. 이런 이질적인 흐름은 신약성서에도 뚜렷하다. 지금은 어느 때인가? 시대의 징표는 무엇인가? 모세-시나이 전승을 따라 신비가, 예언자로서 새 세상을 꿈꿔야 할 때인가 아니면 왕위계승과 더불어 메시아직도 승계한 왕조신학처럼 해오던 대로 할 때인가?
지금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답습하지 말고 창조적으로 신비가-예언자의 삶을 살라 부르는 것 같다. 75세에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난 아브람의 용기가 가상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