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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5 09:34

배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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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후밀리따 (서울)

 

“너는 성당에 나갈 줄 알았다.”

오랫동안 불교를 믿어왔을 집안에서 성장하시고 목은 이색 선생 이전부터 불교를 신앙했을 집안의 아버지와 결혼하셔서 ‘비례사’라는 절에 열심히 불공을 드리러 다니셨던 어머니께서 세례를 받은 제게 하신 첫 말씀입니다.

 

기억도 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저는 어두운 성전의 중앙에서 약간 뒤편 나무 의자위에 앉아서 제대를 바라봅니다. 어느 때는 울고 있기도 하고 어느 때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론 잠들어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이미지는 제 기억 속에서 떠오른 것인지 어머니의 말씀에 의해 그려진 것인지 저로서도 알 수는 없지만 참으로 고요하고 푸근한 곳에 머물고 있다는 평화로움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치원을 다닐만한 나이의 저는 집에서 형제들과 다툼이 있거나 어머니로부터 꾸지람을 들으면 조용히 없어지곤 하였답니다. 어느 날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지는 딸아이가 걱정이 되어서 골목으로 찾아 나선 어머니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약간 언덕위에 자리한 작은 성당의 문이 조금 열려진 것을 보시고 두어 계단을 올라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제가 거기 혼자 가만히 앉아서 누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더랍니다. 해질녘인데다 붉은 벽돌로 지은 성전의 창이 높아 들어오는 빛조차도 흐릿하게 어두웠는데 평소에 겁이 많았던 키 작은 꼬맹이 딸아이가 그 텅 빈 성당 안에 혼자 뎅그러니 앉아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기도 생뚱맞기도 하여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뒤로 제가 가끔 늦어지면 거기 있겠거니 생각하시고 마음이 편해지셨다고. 제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에서는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가 성전에 들어가 그림을 바라보며 행복해 하는 것처럼 그림 안의 저는 평화로움을 즐기고 있습니다.

 

집 가까이에 있는 성모병원에는 병원 현관에서 응급실로 들어가는 길목에 성당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 들어서면 알 수 없이 꽉 찬 밀도감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병원에서 생사를 오고가는 환자 가족들의 기도로 가득 차 통공하는 영들의 움직임일까요? 아니면 성전이 지닌 독특한 모양에서 오는 느낌일까요? 계란같이 둥근 타원형의 윗부분에 제단이 있고 그 끝부분에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 있습니다. 제대 위 천정을 올려다보면 목재재질로 덧댄 부분이 배의 갑판 느낌이 들어서 생명의 배, 노아의 방주처럼 여겨집니다만 제게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 들어 선 기분을 주는 곳에서 오는 생명감이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너희가 두 사람 이상이 모여 기도하는 곳, 그 곳에 나도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님. 그 곳이 장소의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저는 우리가 혼자서 기도하여도 아니, 우리 혼자의 몸 만으로도 거룩한 주님의 집, 성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자궁(아들의 궁전)안에 살았던 흔적. 우리 몸의 중간부분에 위치하는 생명의 샘 자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곳. 어머니가 그 곳을 통하여 온통 자기를 내어주고 새 생명에 온몸의 영양을 보내주신 길. 탯줄의 끝 부분. ‘배꼽’이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는 자리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어렴풋한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이 저를 평화로 인도하는 것처럼 가만가만 숨을 쉬고 주님께 아뢰는 순간들에 배꼽을 통하여 전해지는 저의 들숨 날숨은 태어나기 이전, 제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받았던 충만한 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그것으로 제가 겸손하고 가난해질 수 있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머니를 통하여,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 안에서 체험케 하신 당신 사랑의 통로, 사랑의 추억, 배꼽.

 

모두 배꼽을 한번 느껴보십시오.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드릴 때보다 주님의 은총이 더 무한하게 느껴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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