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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9 15:32

엄마,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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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데레사 (서울)

 

내 어머니는 가슴이 따뜻한 조선의 여인이었다. 근대 한국, 격동의 100여 년 세월을 살아내시고 지금은 저 멀리 태평양 한가운데 하와이 섬에 아버지와 함께 묻혀 계신다.

 

1916년, 그러니까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된 지 불과 몇 년 후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지역인 진주에서 500여 년을 이어온 유학자 집안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박정’이라는 외자 이름의 이 여인에 대해 쓰려고 하니 나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어머니의 친정은 서부 경남을 대표하는 지방 토호 가문이었기에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들을 위한 군량미를 조달했고, 영•정조 시대에는 암행어사가 남도에 내려오면 외가댁에 머물었다고 한다. 어사 박문수의 친필 족자를 본 일도 있다.

 

허나 어쩌리!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 역사의 뒤틀림은 계속되어 어머니가 철들 나이가 되었을 때는 이미 오빠들이 독립운동에 깊이 연루되어 집안은 난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외삼촌들은 일찍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모두 공부를 마치지 않고 돌아와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아들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면서도 두 딸에게는 신식교육을 시키지 않고 집에다 서당 선생을 모셔다가 한학을 가르치셨다. 지금은 진주여자고등학교가 된 ‘일신학교’는 토호들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거두어 세운 그 지방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데, 외할아버지는 초대 이사장을 하시면서도 자신의 딸들은 그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다. 뼈 속까지 성리학자이셨던 듯하다.

 

어느 날 집 마당에서 ‘덕석말이’가 자행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집안에는 20여 명이 넘는 종복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가족이 도망가다가 붙들려 왔다. 그들 중 부모를 덕석에 말아 자식이 보는 앞에서 다른 종복들 손에 맡겨 매질을 가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도 그 광경을 구경하고 계셨는데, 그때 마침 둘째 외삼촌이 외출에서 돌아와 그 광경을 마주하게 되셨나 보다. 저녁이 되어 어머니는 오빠에게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그토록 모질게 패는데 보고 있을 수 있느냐”고 야단을 맞은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울기도 했지만, 그 후 어머니는 오빠에게 신식교육을 받고 싶다고 의사를 피력했고,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어머니는 시집을 가게 되었고 외가를 지탱하던 노비제도는 시대와 맞물려 외삼촌들에 의해 해체되었다.

 

할아버지의 주변부는 조선총독부의 회유에 넘어가 이미 사업가로 변신한 분들도 계셨지만 제사공장을 해보라는 총독부의 마지막 권유를 뿌리친 외가는 삼촌들의 독립운동 가담으로 더욱 더 궁지에 몰렸다.

 

이 시기에 막내딸을 시집보내게 된 외할아버지는 딸의 편안한 삶을 위해 지체는 본인들보다 낮지만 부자였던 저희 친할아버지를 사돈으로 택하셨다. 창원•마산 일대에 서 10리를 가도 남의 땅을 밟을 일이 없다던 나의 친가는 어머니가 시집온 지 20여 년이 채 되기도 전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토지가 전 재산이던 구시대의 토호는 전통적인 제도의 붕괴와 급변하는 사회환경에 적응할 동력을 상실한 채 몰락해 버렸다.

 

그 후 우리 네 자매의 서울생활은 이모님 댁의 사랑채에서 스산스럽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해본다며 남은 재산을 정리해 일본으로 떠나셨고 의지가지 없는 여동생 가족을 이모님이 끌어 안으셨다. 고난의 여정은 끝이 없는 듯 몇 년 후 아버지가 돌아오신 후에도 생활고는 여전했고, 한동안 식구들의 생계는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었다.

 

여성이 나서서 바깥일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로 교육받고 자란 나의 엄마는 커다란 집의 추녀만 봐도 ‘저기서 자리 잡고 떡 장사라도 하면 내 새끼들을 위한 학비는 벌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셨단다. 하지만 어떤 장사도 시작해 보지는 못하셨다. 사농공상 중 장사를 가장 천한 직업으로 치부하던 구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듯하다.

 

가난한 살림에도 나의 엄마는 나눔은 확실히 실천하고 사셨다. 주기적으로 집에 젓갈을 팔러오는 남도 분이 있었는데 그 아줌마가 오는 날엔 거의 아침을 드시지 않으셨다. 아침과 점심 사이에 그 아줌마가 오면 남겨두었던 반찬들을 모두 꺼내 잘 차려 먹이고,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어주시곤 했다. 그 아줌마는 여름엔 고향에 내려가 남편을 거들어 농사짓고 겨울이 되면 서울로 와 머리에 이고 다니며 장사를 하는 강인한 여성이었는데, 엄마는 안쓰럽다며 오랫동안 돌봐주셨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하숙을 하던 내 친할머니의 친정 후손들은 그들의 친지를 찾지 않고 구태여 우리 할머니를 찾아뵙는다는 핑계로 수시로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우리 형제들과는 친구처럼 지냈다. 지금도 만나면 ‘진주 아지매의 요리 솜씨’를 이야기하곤 한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밥은, 즉 물질은 나누기 위해 있는 것이었나 보다.

 

조선시대 내내 궁궐의 수라간에는 각 도를 대표하는 요리장들이 상주했다고 한다. 팔도의 요리 장인들이 선발되어 왔다는데 우리 할머니는 “에미는 시대를 잘 못 타고 났다. 조금 전 세대에만 태어났어도 한양으로 뽑혀 올라갔을 터인데…”라고 늘 아쉬워하셨다. 할머니 생각엔 자신의 며느리가 경상도에서 제일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이 있으셨다.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고 산 삶을 돌아보며 때론 슬퍼하셨고 자존감을 잃고 나아가 삶의 의미조차 스러져 갈 때는 우리에게 푸념처럼 말씀하셨다. “네 명의 딸 중 그 어느 한 명도 나와 같은 삶을 살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이 말의 뜻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는데, 아마 내 언니들 모두 다르지 않을 듯하다. 왜냐하면 엄마는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으니까. 우리 세대의 대부분의 어머니처럼 자기 희생을 미덕으로 삼아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냈기에.

 

2019년 어머니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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