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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5 18:16

가로수와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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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선 레지나(서울 글방)

 

우주의 하명 아래 어둠을 시작으로

밤은 태고적부터 위임받은 본연의 자세를 세운다. 재생이다.

벅찬 태양의 지분으로 꿈을 키운 생명들.

하루의 노동에서 벗어나 숙면으로 피를 정화하고

근육을 야무지게 한 올 한 올 길을 내는 시간이다.

어둠속에서 더욱 은밀하게 형성되는 멜라토닌은

또 다른 오늘을 살아내는데 필요한 역량의 수치를 서두르지 않는 속도로 키워내고.

작은 화분의 나무는 오른쪽 이파리를 가장자리 새순이 터지기 전,

어느 쪽으로 눕힐지 아니면 조금 늦춰야할지 고민하며.

새끼 갖은 짐승도 비로드 같이 부드럽고 폭삭한 둥지와 자신의 건강상태를 체크한다.

나름 의식 있게 분주한 밤의 정비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가로수는 말이 적은 편이라 언제부턴가 같이 살게 된 가로등과는 별 대화가 없다.

여름 끝자락에 오는 추석도 무사히 보내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동네 인심으로

이제는 가을 수확만 남아 있는데. 새벽녘 설친 잠으로 하품만 작렬하다.

밤길의 파수꾼으로 아침에 퇴근 한 가로등은 충혈 된 눈으로 이부자리를 깔고

가로수는 출근을 서두른다.

 

땀직한 가로등은 밤새 그 어렵다는,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불빛을 요리조리

높낮이를 조절하며 가로수의 수면에 방해될까 얼마나 진땀을 흘렸던지.

아직도 허리에 경련기가 남아 있다. 또 내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할 뿐.

그래도 마지막 여자 길손의 도착지까지 훤히 비춰 준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나이테만큼이나 몸통을 키운 가로수는

울울 창창 나뭇가지 사이로 파고드는 눈부심으로 도로의 아우성들을 잠재운다.

사방으로 펼쳐진 햇볕을 끌어당겨 자신의 본분을 더하고,

세상으로 이 늦은 10월에 마지막 남은 푸르름을 누구도 들리지 않게 힘껏 내품는다.

순리에 순응한 낙엽도 다음 생을 위해 겨우내 사유가 되고 목소리가 될 것이다.

 

바람이 없는 어느 날, 차렷 자세로 졸고 있는 가로등을 오래 쳐다보는 가로수.

‘너나 나나 죽지 않고는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몸. 항의란 있을 수 없는 길’.

급기야 엉덩이를 살짝 틀고 앉더니 가로등의 눈가에 발을 치듯 그늘을 앉히고

귀 쪽으로 넓적한 손바닥을 얹는다.

노모가 나이든 아들의 잠자리를 살피 듯 세심함이 출렁출렁.

부여 받은 세상 몫에 회의가 들지만 자신을 인정해주고

겨울 비 맞고 서 있는 날에도 그 큰 잎사귀를 세워 자신의 등을 또닥이는 가로수의 배려에,

가로등은 숙인 얼굴을 한 번도 빳빳하게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하늘에 선처를 바란 적도 없고.

그저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정작 가까운 이에게는 민폐가 되는 꼴도 있다.

우주의 프로그램에는 타인에게 돌아가는 이익도

정밀하게 저울질하여 값이 한정돼 있는 건지.

전체를 보지 못한 시선 때문인지.

손해 보는 한쪽은 꼭 있다.

손해와 이익은 한 통속이라는데. 인정은 쉽지 않고.

 

주야간 근무는 해 뜨고 해 지는 일처럼 또렷하고 변동이 없다.

둘은, 같은 시간 함께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혹, 가로등이 업무과다로 드러눕기 전에는.

가로수는 가로등과 함께 살아가는 한 수면안대는 필수품이지 싶다.

 

오늘 밤, 우주의 움직임 안에도

이 작은 것들의 노고가 분명 포함돼 있으리라.

 

가로수와 가로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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