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체 생활과 치유 그리고 그 영성 : 강의 1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 >

by 이보나 posted May 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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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방금 우리가 나눈 인사는 단지 전례적인 인사말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신앙 고백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어디서나, 언제든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우리는 입으로 고백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이를 깊이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 신앙생활의 현실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저는 2년 전 폴랜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 입구에는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한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신앙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실패, 아니 인간의 실패는 미가 예언자에 의하면 ‘기억의 실패‘라고 단정합니다. 실패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업적을 잊어버림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그분께서 하신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삶, 그게 바로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의식이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여러 차원이 있고 단계가 있겠지만, 창세기에서 야곱과 에사오의 차이는 먼저 야곱은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알고 믿었지만, 상대적으로 에사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형 에사오로부터 장자의 상속권을 산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으로 에사오에게 갈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을 가로챈 후, 베델 광야에서 돌을 베게 삼아 잠들게 됩니다. 그때 그는 꿈에서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28,15)는 선조의 하느님을 만나고 난 뒤, 이렇게 외치지 않습니까?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28,16)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28,17)하고 외쳤지요. 그런 다음 야곱은 그곳을 베델(=하느님의 집)이라 부르고 자기가 가야 할 길에 함께 하여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하느님을 아는 단계, 인식의 단계에서 느끼는 단계, 의식의 단계로 넘어가야 하며, 이 의식의 단계에서 자신의 전 존재를 기꺼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봉헌하는 헌신의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사실 사탄은 누구보다 ’이곳에‘ 하느님의 계심을 알고 느끼지만, 하느님께 헌신하거나 순명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서나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방패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생 육화하시면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테28,20)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은 우리의 호흡이자 심장 박동 자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당신의 존재로 가르치시고, 함께 계신 하느님 곧 하느님 나라를 살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신앙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마치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오늘의 젊은 세대를 일컬어, <나-자기 중심세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2002년 어느 신문사의 한국인의 의식 변화 조사에 의하면, 물론 다른 나라 역시 동일한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만, <앞으로 20년 후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20~30대에게 물어보았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배우자 혹 자녀 그리고 부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될 것이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지요. 그러니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세상은 자기중심적 세상, 이기주의가 더 팽배해지고 심화되어 갈 것입니다. (*사실 그 20년 후가 바로 내년 2022년입니다.) 그러니 오늘 세상의 관심은 종교나 정치 그리고 사회정의도 아니라 ’자기 자신의 소비와 건강‘을 위한 자기중심적 웰빙과 행복이 주된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면,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웰빙도 없고 행복도 없는데 말입니다.

 

<well being 붐>은 모든 분야에 걸쳐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웰빙은 오늘 우리 시대에만 발생한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닌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근본적으로 크리스챤 생활은 웰빙이며, 특별히 수도 생활은 본질적으로 웰빙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양상이 세대마다 다르게 나타날 뿐입니다. <잘 살아 보세!!> 예전에는 너무나 가난했기에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기반한 외적인 면에서 웰빙이었다면, 지금의 추세는 질적이고 내면적인 면에서 웰빙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엎그레이드 되고 있으며, 마침내 7up 상태까지 엎그레이드되었습니다. 수도원의 오랜 건강 프로그램의 웰빙은 첫째로 제대로 잠자기입니다. 지금 세상은 잠 못 드는 세상이라고 하며, 세상에서 가장 늦게 자는 민족이 스페인 사람이며, 한국 사람은 3위라고 합니다. 수도원에서는 ‘닭장에 있는 닭들과 잠자리에 드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똑같다.’는 표현은, 바로 웰빙의 첫 걸음이 제대로 잠자기이지만 수도자들도 이젠 제 때 잠을 자지 않습니다. (*저와 제 주변의 아는 분들도 수면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둘째로 제대로 먹기입니다. 천천히 먹고 가능한 침묵하는 게 좋은데, 형제애를 확인하기 위해 식사 중에도 말을 많이 하고 빨리 먹습니다. (* 저희 일곡동 수도원 식사 시간은 본디 30분인데, 지금은 거의 15분이면...) 저 자신부터 식사 시간에 세상의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먹고 음식을 즐길 수 있기 위해 천천히 먹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음식을 남기지 않습니다. 셋째로 제대로 긴장 풀기입니다. 우리는 쉬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다들 경험하셨겠지만, 놀고 나면(=휴가 후) 더 피곤합니다. 제대로 쉴지 모르고 규칙적인 생활 리듬을 잃어버렸습니다. 넷째로 제대로 어울리기입니다. 타인과 만남을 지나치게 추구하거나 지나치게 회피하는 것은 제대로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의 조화가 필요하고, 고독은 친교를 위한 바탕입니다. 이처럼 참된 웰빙적인 생활을 우리는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저도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호르몬의 작용으로 똥배(?)가 나왔습니다만 모든 생활면에서 비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천사가 날아다닐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하지요. 천사들은 본래 가벼워서 그러기도 하지만 무거운 걸 지니고 있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네요? 우리는 단지 육적 비만만이 아니라 영적 비만도 걸려 있습니다.

 

첨단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수도원의 건강법이나 치료술은 점점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새로운 것 인양 사람들이 관심하는 웰빙 붐으로, 이런 움직임은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아주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며 자고 쉬는 면에서 좀 더 제대로 먹고 제대로 살자는 것이 삶의 흐름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먹는 면에서 웰빙 바람은 먹거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깨어남입니다. 유기농 식품에 대한 선호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닌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먹거리로 인한 피해나 문제가 속출하고 불량 식품에 관한 뉴스가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광우병 파동이 끝나나 싶더니 다시 발생하고 있으며, 달걀과 닭고기에는 살모넬라 세균, 그리고 조류 독감, 유아용 식품에는 살충제가, 포도주에는 글리콜이, 고기에는 다이옥신이 들어 있다고 난리입니다. 대량 생산에 따른 농약의 과다 사용과 부적절한 사료 사용으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소량 생산이지만 친환경적. 인체에 무해無害한 식품을 비싸지만 선호하게 되고, 건강에 좋은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겠죠. 이로 인해 없는 사람들, 곧 가난한 사람들만이 유해한 식품을 먹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먹는 것 식품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 반성해야 합니다. 당장에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불량 식품이 판치고 있으니 없는 서민들만 죽어 나갑니다.

 

아울러 먹거리 회복의 또 다른 점은 옛것에 대한 그리고 우리 것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지요. 신토불이, 이제 정신이 드나 봅니다. 우리 것을 찾는 것을 보면서... 옛것이 그리고 우리 고유의 먹거리의 긍정적인 면을 알고 되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여간 반갑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신자분의 아들이 초등학생인데 비만으로 인해 비만 치료 크리닉에 다닌다고 합니다. 요즘 미국에서도 일부 지방에선 인스탄트 식품과 음료수를 학교에서 팔지 못하게 법으로 제정했다고 하는 것처럼 비만의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비만과의 전쟁 이것이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 아닙니까? 그런데 비만 크리닉의 처방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옛날에 저희가 지겹게 먹던 것을 ‘먹어라’는 단순한 권고였대요. 보리밥, 두부, 된장과 청국장, 채식 등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예전은 동일한 것을 먹어도 영양실조에 걸렸는데 오늘은 비만 치료에 효과가 된다고 할까요. 그것은 아주 단순한데 있다고 봅니다. 기분 좋게 먹느냐, 어쩔 수 없이 먹느냐의 차이인 듯 싶습니다.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먹었는데 지금은 필요해서 먹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문제인가 봅니다. 물론 다른 영양제를 섭취하고, 간식도 먹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요. 그런데 최근의 6월 말 뉴스위크지에 이런 기사가 게재되었답니다. 미국의 영향 심리학자인 막 데이비드 박사의 주장입니다. <무엇을 먹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다.>고. 스트레스가 있나 없나, 마음을 얼마나 즐겁게 갖는가 그렇지 않는가, 어떤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있나 등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몸의 신진대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결론 부분에서 <기도가 체중 감소에 효과적이다.>고 주장했다네요. 요즘 저도 건강에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늘 건강만큼은 자신이 있었는데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눈이며 귀와 입, 허리며 심장 등 고장 나지 않은 부분이 없을 만큼, 나이 들어가면서 몸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문제는 바로, 저처럼 오랜 식습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콩이나 두부, 멸치와 우유 그리고 돼지고기 등을 40대 초반까지 먹지 않았습니다. 편식 아닌 편식으로 이런 결과가 일어난 듯싶어 지금은 후회막급입니다. 그래서 제가 새삼스럽게 관심을 갖는 것은 <최소양분율>이란 이론입니다. 즉 <가장 적은 것의 부족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것>인데, 우리 몸은 아주 적은 비타민, 칼슘, 철분 등의 부족이 몸의 불균형과 영양 부족을 낳고 건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먹거리 회복, 식문화의 회복은 단지 육적인 삶만이 아닌 심리적이고 영적인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은 곧 거룩한 삶과 직결됩니다. 웰빙의 밑바닥에는 어쩌면 우리가 돌보지 못한 몸과 정신 그리고 영육의 조화의 필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움직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혹 영적 생활은 인간의 삶의 부분이 아닌 총체적인 삶과 연관성을 강조하지요. 사실 거룩한 삶에서 ‘거룩’이란 영어 단어 holy란 단어는 아시는 것처럼 ‘Whole전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거룩한 삶은 부분이 아닌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 전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Holiness란 전체성Wholeness과 충만성 Fullness을 의미하며, 곧 거룩함은 곧 육신의 건강 Health과도 직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웰빙과 함께 또 다른 추세는 행복에 관한 관심입니다. 그 어느 때 보다 사람들은 참된 행복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부정적인 응답이 대다수입니다. 그 주된 원인은 3가지로 집약될 수 있지요. 즉 첫째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둘째는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함, 셋째는 건강 문제입니다. 결국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가정과 일터에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정체성이 흔들릴 때, 급격히 건강이 나빠진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인간관계가 어렵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 우리의 몸은 기혈이 막히고 경락의 흐름이 원활치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과 땅의 울림통인 우리 자신 몸통 안에서 하늘과의 조율이 어렵게 되고, 우주의 기와 에너지가 차단됩니다. 결국 스스로의 기운氣運으로만 운행하게 되니 신명이나 신바람이 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 건강 또한 원활치 않으니 육신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자명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마음과 정신과 몸은 상호유기적인, 보완 보충 그리고 상생의 관계이기에 거룩한 삶이란 부분이 아닌 전 인격적인 것이며, 건강한 삶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는 이런 거룩한 삶을 지향하는, 건강한 삶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양식이란 말을 들을 때, 양식 때문에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춥고 배고픈 시절, 그때 그 시절을 아신다면, 양식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제 어머니의 표현처럼 가족들의 끼니, 먹을거리를 의미하지요? 양식으로써 먹거리는 배고플 때 비로소 먹거리인 양식의 고마움과 고귀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때, 아무리 그 음식이 맛있고 귀하고 영양이 많으며 비싸다고 하더라도 그 음식의 은혜로움과 필요함을 절박하게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은혜로움을 은혜로움으로 느끼지 않은 세상>입니다. 산다는 게 다 은혜이며 이를 느낄 때 감사가 넘쳐날 것인데, 이런 삶과 직결되는 먹거리로부터 감사하는 마음, 은혜로운 마음을 잃어갈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양식에 대한 고마움도 감사함도 함께 잃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신 끼니에 감사하는 마음, 이보다 더 근본적인 신앙인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먹을거리가 너무도 풍요로운 세상에 살다 보니, 그 귀함을 감사하지 않고 낭비하거나 쉽게 버리잖아요? 쌀 한톨이라도 버리면 큰일 난 것처럼 야단을 치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립니다. 이런 점은 단지 음식만의 예가 아니지요. 예전 60~70년대에 이곳 미국에 이민 오셨던 신자분들은 한국어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 몇백km를 자동차로 운전해 오고 가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때는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었습니까? 지금은 어느 도시에나 한국인 본당이 있어서 어느 때든 한국어 미사에 참여할 수 있고, 여러 신부님을 초청해서 피정이나 특강을 듣다 보니 이젠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고 때론 귀찮게 대하기도 하더군요. 저 역시도 가까운 핏츠버그에서 본당신부로 일했으니까요. 물론 예전이 무조건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전처럼 그런 절박함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고 잃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시편 42, 4절에 보면 <축제의 모임, 환희와 찬미 소리 드높던 그 행렬, 우리들 앞장서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일...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집니다.>는 노래는 바로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이 예전에 같은 동포들과 함께 성전에서 기도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감회에 젖는 노래입니다. 감격이 없는 세상, 감동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요구됩니다. 신앙은 어떤 점에서 감격이고 감동하는 것입니다. 어느 유행가 노랫말처럼 “눈물이 핑도네요 정말로, 가슴이 뛰노네요 정말로!”가 필요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성체성사 해의 주제는 루카복음 24장의 엠마오의 여정에서 제자들이 자신들의 여정에 동행하시며 말씀으로 눈과 마음을 열어 주신 주님께 간곡하게 청한 <주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묵어 달라고 예수께 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당신의 집, 당신의 식탁에서 당신과 함께 식사해 달라고 우리에게 청한다고 생각하기가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의 초대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라는 초대가 없으면, 예수께서는 다른 곳으로 이내 지나쳐 가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절대로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초대하지 않는 한, 그분은 우리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멋진 사람이겠지만, 언제까지나 낯선 이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직도 낯선 이로 계십니까 아니면 인생의 동반자이자 친구처럼 친밀한 분이십니까? 만일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면 그분을 초대해야 합니다. 주님 저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인생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인생의 모든 만남이나 사건은 우연도 아니고 필연도 아닌, 다만 사랑의 사건만이 있을 뿐입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애창곡을 조사했었는데, 노사연의 <만남>이 1위로 조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 까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진정한 만남을 원하고,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길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에게서 주님은 늘 마음이 따뜻하고 다정스런 분으로 그냥 스쳐 지나가길 원하지 않고 진솔한 사랑의 만남이 되길 원하시며 우리의 진솔한 초대를 받길 원하십니다. 초대는 낯선 이를 신뢰하고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표시입니다. 자신의 집에, 식탁에 초대하는 것은 친밀함의 표시입니다. 식탁은 사람들 사이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손님이셨지만, 그들의 식탁에 앉자, 곧 그들을 초대하는 주인이 되시고, 초대한 그들을 사랑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분을 초대하고, 초대받으신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어 우리를 생명의 식탁으로 초대하시도록 그분을 기꺼이 우리네 식탁에, 우리네 삶의 자리에 기꺼이 초대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성자께서 강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성자께서 강생하신 까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흔히 개신교 신자들에게 <구원받으셨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거침없이, 지체하지 않고 <네!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응답하는 모습을 쉽게 봅니다. 그에 반해 천주교 신자들에게 <여러분, 구원받으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많은 신자는 <글씨, 내가 구원받았는지 구원받지 않았는지 솔직히 까놓고 잘 모르겠어요>라고 반응합니다. 구원이란 <사랑으로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이 필요합니까? 쉬운 말로, 지금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각자가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구원이라 할 수 있지요. 신학적인 측면에서, 인간 구원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소극적 구원과 적극적 구원입니다. 소극적 구원은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서 건져 내는 것에 비유한다면, 적극적 구원은 물에서 건져 낸 사람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여 훌륭히 교육시켜 사람답게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극적 구원은 인간해방 즉 죽음과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나자렛 고향에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앞으로 펼친 당신 사도직의 청사진을 제시하셨잖아요.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묶인 사람)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억눌린 사람들에게)을 해방시켜(=자유를 주며)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Lk 4,18~19) 우리는 재물, 권력 그리고 성에 묶여 있으며, 자만심과 욕심에 눈멀며, 질병과 악령 그리고 죄에 억눌려 있는 게 인간의 현실이며 상태입니다. 바로 이런 모든 묶임과 눈멂 그리고 억눌림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구원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적극적 구원은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시켜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친교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하느님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외 아드님은 우리가 당신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신이 되도록 우리 인성을 취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신화神化를 위해서 하느님이 인간으로서의 육화가 필요했고 더 구체적으로 빵의 모습으로 우리 각자에게 강생하심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체는 곧 천주성자 강생의 신비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강생의 연장이며 구원의 표지입니다. 사랑과 생명의 완성이며 충만함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을 통해서 줄곧 예수께서 말씀하신 주된 가르침은, <당신은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신 분이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함께 계신 아버지께선 당신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시기에 당신도 그 일을 하신다.>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모세의 전구로 하늘에서 내려 온 만나는 하느님의 거처인 하늘로부터 온 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온 빵은 만나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Jn6,51) 라고 할 때,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는 빵은 일시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빵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빵입니다. 이 빵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아버지로부터 내려 온 바로 예수 자신입니다. 루가복음 22장 19절에서 예수님은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며, 살아 있는 빵, 하늘에서 내려 온 빵>(Jn6,35.41.51참조)입니다. 예수님의 몸인 생명의 빵을 먹는 자,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의 빵으로 주어지는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명의 빵인 자신을 먹임으로써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습니다.> (Jn10,10)

 

<왜 사는지 해답을 찾지 못해도 살아가지만,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는 이태리 속담처럼 여러분은 누구 때문에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하느님 때문에 살아갑니까? 신앙인의 삶은 바로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단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는데 잊지 않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요 생명이신 하느님을 찾고 만나고 사는데 있지요. 요한 6, 27에서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썩어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고 하신 의도는 무엇이며 섞지 않는 양식은 어떤 양식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양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위해선 사마리아 여인과 만났던 시카르 우물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자들이 <스승님, 잡수십시오.>하자,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Jn4,32. 34)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예수님의 허기는 채워지고 그분의 삶은 활력으로 넘치고 활동으로 드러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양식을 얻도록 힘써야 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들의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안정과 보전을 위한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성취하는 삶을 살도록 힘써라는 요구이지요. 영원한 삶을 찾도록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때, 우리 역시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우리네 인생살이에 신바람이 넘치고, 살아야 하는 존재 이유를 알면 매사가 삶의 활력과 에너지로 넘쳐 배고픈지 모를 것입니다. 그분은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당신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존재가 되고 그런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도록 하려면 우리 자신이 성체 안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가야 하며, 나간 우리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이끄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Jn6,44.45)

 

이거야말로 임도 따고 뽕도 따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나아감은 마치 고구마 줄기를 잡아당기면 고구마가 주렁주렁 매달려 딸려오는 모습처럼,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서 아버지를 만나고, 성령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님 마리아와 성인 성녀 그리고 많은 형제자매를 만납니다. 이보다 더 은혜로운 일이, 성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체 안에서 우리는 예수를 찾음으로써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Jn6,40) 그리스도의 사랑인 성체를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 자신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린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우리가 그 소수의 사람이란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Jn6,37)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Jn 6,39)

 

당신에게 오는 사람, 당신에게 맡겨진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려는 예수님을 진정 모르고 있을 때도,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마지막 만찬 순간까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까닭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자신들의 생각이나 계획에 너무 집착함으로써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반성하면서, 우리 역시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각자를 아는 만큼 우리는 그분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제 엄마가, <너희도 이다음에 시집 장가가서 너 닮은 자식 낳고 살다보면, 이 에미 속 알끼여!>라고 했었습니다. 이처럼 안다는 것은 머리의 앎이 아닌 삶의 경험이나 체험을 통한 앎,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만일 사도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면, 특히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Jn14,9)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토마스에게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 뵌 것이다.>(Jn14,6)고 말씀하신 까닭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정말로 생명의 빵인 성체의 신비를 이해하게 되는 때는 오로지 우리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알아볼 때이며 믿을 때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은 진정 한몸, 한마음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 때 당신의 사명 전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Jn16,28) 그런데 예수님께선 혼자 성부께로 돌아가시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닙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도 당신과 함께 성부께로 이끌어 가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구원 움직임, 구원 경륜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체는 성부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곧 성체는 우리를 성령 안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귀환시키는 성사이며, 구원사업의 모든 요소를 다 포함하고 완전히 실현하는 모든 은총의 원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성체 안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리하여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나 오늘날도, 성체 신심의 중심은 성찬례입니다. 성찬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이신 성부께 향하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성찬례의 주된 움직임은 아버지께로 향해 <마음을 드높이> 올라가는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중세기에는 성찬례 자체보다, 성체 신심에 집중하다 보니 올라가는 움직임 대신에 내려오는 움직임이 강조되기 시작하였지요. 사실 중세기부터 신자들의 신심은 사제가 보여 주는 성체를 보는 것에 집중되어, 빵과 포도주의 외형과 외관 속에 숨어 지금 또다시 하늘에서 ’내려와‘ 성체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배에 집중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의 시선이나 마음의 중심은 성체 안에 현존하여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되었습니다. 신심의 방향이 <성부께로 올라가는 동적 성격>은 차츰 흐려지고, 제단 위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마치 신하가 임금을 알현하듯 받들게 되고, 성체를 배령하는 방법은 <정적 성격>을 띄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경향은 더욱이 신자들의 성체에 대한 신심이 성체의 현시, 성체강복, 성체 행렬, 성체 방문이라는 성찬례 이외의 여러 가지 형식 면으로 점점 강하게 신심의 방향이 흘러오면서 한층 더 강해졌습니다. 성체에 대한 이와 같은 신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은 강조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성부와 성체의 관계는 망각하는 부정적인 면도 드러나게 되었지요. 그래서 성체 배령조차도 서서히 성찬례에서 분리되어 주로 우리에게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내려오심, 하강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성체 신심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며 버리거나 폐지하거나 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성체 안에 현존하시고 임재하시고 계시며 우리가 흠숭과 사랑과 감사를 다 할수록 더욱 적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심만을 취하고 다른 것을 배척한다면, 성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불완전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성체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성체성사의 주요한 면에 대하여 충분한 주의와 강조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주요한 면은, 곧 성체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아버지이신 성부께로 귀의하는 성사라는 것이며,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인간과의 중개자이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성체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함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1디 2,5참조)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자면, 하느님은 인류와 결합하시기 위해, 다른 표현으로 영적 혼인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류를 창조하셨으며, 강생하심으로써 인류와 결혼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는 곧 결혼의 본질인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은 성체 안에서 진정으로 인간과 결합 되십니다. 강생과 성체는 동일하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를 통하여 인류 전체와 결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강생이 그리스도에서 끝나지 않고, 인류 전체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현존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그냥 거기 머무르시기 위해서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결합이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당신을 양식으로 내어 주시려고 성체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체는 우선적으로 현존이 아닙니다. 성체는 우선적으로 결합이고, 결합이 현존을 끌어드립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Jn6,55~56) 이처럼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유 없이 인간과 결합 관계 안에 들어오신 것을 우리는 하느님의 무상성이라 표현합니다. 거저 베푸심, 공짜인 은총, 사랑이지요. 복음의 기쁨 소식이란 곧 모든 것이 거저 받았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일을 두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구원으로 철저하게 거두어주셨음을 알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은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 곧 아버지의 베푸심으로 제시하십니다. 거저 베푸신 은총과 사랑에 다만 인간은 감사로 되돌려 바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늘 감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굶주림의 상황에서도 예수께서는 <아버지 제 손에 든 빵을 부풀려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감사드립니다.>고 기도하셨습니다. (Jn6,11) 빵이 많아지기도 전에,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또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죽음이라는 한정된 상황 앞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Jn11,41)고 기도하셨습니다. 라자로가 아직 되살아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은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음식을 거절하신 것은, 아버지가 당신에게 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돌을 빵으로 만들기를 거절하신 깊은 뜻입니다. 그분은 당연히 감사드릴 수 있는 것만을 잡수시길 원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숨을 쉬듯이 감사하셨지요. 바오로 사도의 호흡은 감사의 행위라고 말해도 좋을듯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끊임없이 감사들 드리도록 권고합니다. 그에게 있어서도 은총의 작용은 언제나 감사와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은총은 하느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베푸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강생과 성체, 성체와 은총, 성체와 양식의 관련성, 관계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양식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입니다. 곧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합니다. 빵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의 상징입니다. 내 양식에서 약간의 빵과 몇 방울의 포도주를 하느님께 바치는 행위는 바로 양식의 형태로 드리는 감사의 행위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라면, 모든 것이 감사여야 합니다. 성체는 본디 감사이기에, 성체가 은총, 거저 주신 선물이라고 감사하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존재로 준 것을 어떻게 머리로 감사할 수 없기에. 존재로, 삶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우리는 본디 받은 것이기에 생명의 빵을 주시는 하느님께 드릴 것이 없고, 받은 것을 다시 돌려 드리는 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이미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은 소유자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당신에게 모든 것을 드립니다.>는 파스칼의 표현은 그리스도교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인의 태도는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영성 수련의 마지막 기도문으로 사용한 <나의 하느님, 당신에게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고 하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관리자이기에 다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되돌려 바쳐야 합니다.

 

성체를 통하여 성자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저 유일무이한 십자가의 봉헌 행위로, 우리를 들어 올리고 이리하여 <그리스도를 구성하는 머리도 지체도>(성 아오스딩), 즉 그리스도도 그 교회도 성령 안에 성부께 일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세상 종말 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 즉 성령에 의해서 일치와 친교는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아버지와 마음으로 하나가 된 사람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고 있는 존재는 모든 사람이며 특별히 작은 자, 가난한 자,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당한 사람들이겠지요. 따라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실한 인간의 사랑이야말로 성찬례의 참된 열매이며 표지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꼭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재촉합니다. 또 하나의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는 존재,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어 사랑이 되라고! 사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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