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조회 수 23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잠시 동안 몸의 여러 부분의 감각들을 의식한 다음에 이 훈련을 시작하십시오.

이제 호흡을 의식하십시오. 공기가 콧구멍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공기가 폐로 들어가는 것에까지 정신을 집중하지 말고, 공기가 콧구멍을 지나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서 그치십시오. 

호흡을 조절하지 마십시오. 숨을 깊이 쉬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이 훈련은 알아차리기      훈련이지 호흡하기 훈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호흡이 약하면 약한 대로 내버려 두십시      오. 호흡에 신경을 쓰지 말고 그냥 주시하시기만 하십시오. 

분심이 들때 마다, 다시 용기를 내어 하던 일을 계속하십시오. 사실은 이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는 호흡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3분 )

대부분의 사람은 이 방법이 무척 힘들다고 합니다. 이 방법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쉬게 하는 데에 효과가 있습니다. 호흡을 의식하려고 애쓰다가 근육을 긴장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처음에는 분심이 많이 들 것이라고 예상해야 합니다. 아무리 분심이 들더라도 그때마다 정신을 가다듬고 거듭거듭 호흡을 의식하는 작업에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하는 그 사실만으로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방법에 어느 정도 숙달되거든, 조금 더 어렵고 효과적인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십시오.

공기가 콧구멍을 지날 때의 감각을 의식해 보십시오. 공기가 와 닿는 감촉을 느끼십시오. 숨을 들이 쉴 때 공기가 콧구멍의 어느 부분에 와 닿는지를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숨을 내쉴 때에는 공기가 콧구멍의 어느 부분에 와 닿는 지를 느껴 보십시오.

가능하면, 공기의 차고 훈훈함을, 들이 쉴 때는 차갑고, 내 쉴 때에는 따스함을 알아 차리십시오. 

또한 콧구멍으로는 공기가 더 많이 지나가고, 다른 콧구멍으로는 그보다 적게 지나가는 것을 의식 해 봐도 좋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쉴 때에 공기가 콧구멍을 지나며 와 닿는 그 가장 미미하고 미세한 감각들을 정신을 차리고 예민하게 느껴 보십시오. 이 훈련을 중단하라는 신호음이 울릴 때까지 계속 하십시오. (=8분)

각 방법에 지정된 시간들은 여러분이 이 방법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게 되고 또한 거기서 도움을 받게 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방법을 더 오래 연습하면 할수록 틀림없이 더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한 말에 대해서 한 가지 단서를 붙이겠습니다. 호흡을 의식하는 이 훈련만을 단번에 여러 시간씩 감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호흡과 같은 매우 미묘한 기능에 오랫동안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환각이 생기게 되거나 또는 무의식의 세계 속에 있는 일들이 떠오르게 되어 스스로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위험성은 희박하고, 또 이런 종류의 활동을 몇 시간씩 계속 감행해 보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여러분이 늘 그러한 위험성을 염두에 두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방법이야말로 평화와 자제력을,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얻고자 원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치 있고 좋은 방법인가를 말로서는 다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동양의 한 유명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의 호흡이 너의 가장 훌륭한 친구이다. 어떤 곤경에 처하든지 다시 호흡에다 마음을 모아라. 그러면 네 마음을 달래주고 너를 인도해 줄 것이다.” 신비스러운 말입니다. -하기는 여러분도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여 호흡을 의식하는 이 어려운 기술을 터득하고 나면 아마 여러분도 이 말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기도학교 강의 4: 기도의 배경과 기본 이해>

  
먼저 기도에 관해서, 기도의 과정이나 단계를 말하기 이전에 기도의 가장 기본적 배경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합시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교 기도의 배경은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접근을 의미합니다. 

         (1) 기도는 <있는 어떤 것 Something>이 아니라 <없는 것 No-thing> 입니다. 기도 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소유의 관점에서 기도의 개념을 이해해 왔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서구 문화의 부정적 영향입니다. 사실 서구 문화에 있어서 갈등은 존재(Being)보다 소유(Having)를 강조하면서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기도 생활이나 영적 생활을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고 또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도나 영적 생활을 잃었다. 혹은 기도가 어쩐지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이나 투정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도를 마치 소유의 개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봅니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기도 생활을 소유의 개념에서 이해하고 파악하고 있다면 이는 곧 양성적養成的(=교육이란 이끌어 냄; 본래적으로 타고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이라기보다는 비양성적非陽性的 환상에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활발한 소비 문화는 보다 많은 소유와 획득을 강조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소유증가에 관심을 쏟도록 강요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가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을 때,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고 대우합니다. (=옷이 날개다; 명품 집착) 이러한 소유 개념이나 관념이 영적 생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교회 안의 모든 계층에 미치고 있습니다. <그는 좋은 기도 생활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도를 잃어 버렸다.> 기도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기보다는 우리의 존재 감각을 되살려 주는 것입니다.
  
        명사의 증가    ---------------       동사의 감소
           ⇩                                         ⇩  
        물건(Thing)                        구체적 과정(사랑하다, 바라다, 행하다...)

        소유의 동기: 이익/ 획득/ 쾌락/ 권력/ 소유의지 ⇨ 소외 현상 야기
      참고적으로 마틴 부버의 <너와 나>를 한번 읽어 보시지요?

이러한 서구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은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생활과 기도 생활에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도는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존재 감각을 되살려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소유로부터 소외입니다. 이때 하느님과 관계는 <나-너의 관계>가 아니라 <나 - 그것>의 관계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사실 기도는 참으로 유일무이한 <내가 누구인가>를 체험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없는 기도는 비실존(非實存)이고 거짓된 자아로의 전락입니다. 이는 곧 기도의 부재이며, 비양성적인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는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 혹 많아졌다 적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며, 성장했다 퇴보했다 하지도 않습니다. 기도는 인격적 관계이기에 다만 관계의 멀어짐(=소원함) 혹 가까움(=친밀함)을 느낄 때도 있고, 냉냉함을 혹은 뜨거움을 느낄 때가 있을 뿐입니다. 

그 까닭은 하느님 쪽에서 문제라기보다 기도하는 나의 쪽에서, 즉 신체적이나 심리적(내적 불안과 근심) 상태, 정화되지 않은 인간적 욕심이나 갈망, 개인적인 희망 사항에 대한 자기만족과 외적 자극(=특별한 감각적 요구--환시나 환청 등)에 대한 집착하거나 세상적인 축복과 기복적 측면에 초점 (= 항구에 정박된 배의 움직임을 보면 닻을 내린 선착장은 고정되어 있고 배가 움직일 뿐이다.)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기복적 측면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무가치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과 관계, 그리고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참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고, 주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자세로 초월자이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소유 개념에서 이해하고 있는 기도는 자기만족과 성취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기 증여 그리고 그에 따른 응답으로 초월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영광 대신에 자아 만족감(=기도가 좋았다거나 그렇지 않았다거나)에 더 취중하고 관심을 둘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단순한 느낌의 추구만이 기도가 아니며, 이러한 자세는 소유욕에서 나오는 환상의 시간일 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도는 소유하고 획득하는 어떤 것(something)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워두며 버리는 것(nothing)입니다. 시간을, 의식을, 그리고 자신을.... 세상적인 가치 기준, 곧 <시간이 돈이다. 혹 활동이 최상이다.>는 관점에서 보면 기도는 낭비이며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입니다. 

         (2) 기도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Pray-er)입니다. 본디 인간 존재는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체험적으로 항상 언제나 초월적 갈망(열망)으로 어떤 그 무엇 혹은 어떤 존재를 지속적으로 목말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지향적 존재가 아니라 타인 지향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우리는 타자이신 하느님을 끊임없이 열망하고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타자 곧 하느님의 존재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하고, 하느님을 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하느님 모상인 사랑으로, 사랑의 존재로 자신을 이해합니다. 사랑은 깊고 높은 우리의 실재적 차원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명상의 씨, 37쪽>에서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실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 모상대로 만들어졌다 함은, 사랑은 내 존재 이유라 함과 같으니,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참 나다. 내 욕심을 차리지 않는 것이 참 나다. 사랑은 나의 참 성격이다. 사랑은 내 이름이다. 그러므로 만일 순전히 하느님의 사랑만을 위한 것이 아닌 무엇을 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알거나, 바란다면, 내게는 기쁨도, 평화도, 안식도, 충족도 깃들일 수 없다. 사랑을 발견하려면 하느님의 본질인 성소, 사랑이 감추인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임의 거룩함에 들어가려면 임이 거룩하심과 같이 나도 거룩해야 하며, 임이 완전하심과 같이 나도 완전해야 한다. 이는 내가 아무리 애쓰고, 나와 싸우고 남과 다툰다 할지라도 하나도 이룰 수 없다. 오로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고 쫓아갈 수 있는 모든 길을 기꺼이 버리는 길밖에 없다. 사랑이 없는 나는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이 나를 임과 같게 만들어 주셔야 한다. 임이 임이신 임의 사랑을 내게 주시고, 내 안에서, 사랑하시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을 같이 하시면 나는 틀림없이 임이신 사랑이 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임안에 나를 잊어버림으로써 참 나를 가질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기도하는 존재이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우리 자신의 유일한 모습, 되어야 할 모습을 깨닫게 되고, 이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상황과 역사, 문화와 환경을 통하여 육화하고 구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부단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어떤 그 무엇으로 말미암아> 영감을 받고 전인적인 삶의 응답을 통해 인간 심층에서부터 솟아나는 초월적 열망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갈망, 곧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욕구는 기도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을 지탱해 줍니다. 갈망이 약하면 노력은 계속되지 못하고 쉽게 멈출 것입니다. 어느 날 제자가 스승에게 와서 기도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청하였답니다. 스승은 그 열심한 제자를 얕은 강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강가에 나란히 앉게 되자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습니다. 20초가 지나고 또 20초가 지났습니다. 그러자 제자는 숨을 헐떡거리며 물 밖으로 머리를 불쑥 내밀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스승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스승은 비로소 그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열망이 공기에 대한 열망만큼 크지 않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기도에 대한 열망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선물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깊은 갈망을 심화시키고 또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이끕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열망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열망과 만나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인간의 갈망과 기도와의 상관관계를 <마음의 기도 97쪽>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열망과 우리의 기도는 ‘당신을 알고 나를 알게 하소서’ (Noverim te, noverim me)라는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말씀에 종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죄악과 죽음에서 구원된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생명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참된 가치 평가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시요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참다운 지식을 얻게 되기를 원한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망각하고, 그 안에서 휴식하기를 원한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또한 우리의 존재를 가지고 응답하기를 원한다. 그분의 자비로우신 원의를 알고 이 원의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한다.>

     (3)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궁극적으로나, 최종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기도   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도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시기에 계속적이고 끊임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 3, 10에서 이 기도 과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사건(=고난-죽음-묻힘-부활)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런 참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친교와 합일에 이릅니다. 이처럼 기도는 바오로의 관점에서 볼 때 <함께: Syn> 즉 그리스도 안에서 타자의 생명에 참여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파스카 신비 안에 참여이며, 이름하여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Participation-Return to the Source)
 
요한복음 16, 28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십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아버지께로 향해 움직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이의 모든 것입니다. (Omnibus Omnia) 그러므로 여하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초월자에 대한 인간 존재 안에 뿌리박힌 초월적 열망의 성취이자 완성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기도의 여정은 <거짓된 자아로부터 — 자기 죽음을 통해서 ---참된 자기로 되돌아감>과 같습니다.

         (4) <기도는 하느님의 거저 주신 은총, 뜻밖의 선물이다. 우리 안에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은총,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형태는 선물, 은총입니다.> 우리 자신은 궁
극적으로 어떤 그 무엇을 일어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성 바오로는 코린토 서간에서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 3)고 하였습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과 목마름은 이미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심이며, 이미 하느님과의 통교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움직임인 이러한 기도의 열망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교회 전통은 이를 두고 Opus Dei 즉,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과의 대화 안에서 기도하는 존재이기에, 이 점을 보다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마음의 기도, 101쪽>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묵상할 때 ‘은총’과 ‘자비’와 ‘신앙’이 우리의 노력으로 획득되나, 우리 자신의 행위에 뒤따르는 당연한 권리처럼 보전되고 항구하고 변치 않은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들은 항상 새로워지는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은총의 생명을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 안에서 직접으로, 친히 때에 따라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묵상의 은총은 역시 하나의 특별한 선물이다. 절대로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는 선물을 주신 분을 잊어버리고 오직 선물에만 관심을 쏟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기도 역시 그런 상태는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선물 보다 선물을 주신 분께 감사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위안을 받으려 애쓰는 대신 위안을 주시는 하느님을 찾도록 하라!>는 권고를 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5)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성령만이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교육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으며, 기도 안에서 우리를 양성할 수 있습니다.> 공관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영원자이신 하느님과의 통교 안에서의 기도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가르칠 수  있다면, 기껏해야 기도의 기본자세나 호흡하는 방법, 의식을 집중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스스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지, 나의 계획이 아닙니다. 기도에 관한 기본적인 교리는 사도 바오로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로마서 8, 26절입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법을 모른다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관계 사이에 심각한 위선에 빠질 위험에 놓여 있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 머튼은 <마음의 기도, 40쪽>에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초보자라는데 완전히 만족하고 자기는 별로 아는 것이 없고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이며, 벌거숭이 상태에서 배우고자 하는 절실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자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지 않고서는 기도와 묵상 생활의 참 난관에 직면할 수 없다. 사실 처음부터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절대로 무엇을 아는데 이르지 못할 것이다. 자기 수준 이상으로 기도하고 묵상하려 하고, ‘기도의 높은 단계’라고 믿어지는 것에 도달해 보려고 지나친 열을 내는 사람들은 진실과 사실에서 멀어져 가고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자기 자신의 전진을 확인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그들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은총이 자기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자신의 공허와 부질없음에 사로잡히게 되고, 무기력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무미건조는 자만심과 영적 허영심에서 오는 열광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긴 세월의 겸손과 참회가 그 구제책이 될는지! 우리는 초보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 생애를 통하여 언제나 초보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기도는 결코 나의 계획이나 활동이 아닙니다. 거저 베풀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다만 ➀ 인간의 내면의 성전에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으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➁ 성령 체험을 기록한 그리스도교적 전통적인 기도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수도회는 나름대로 고유한 기도 방법이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기도에 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기도 체험을 상징화된 언어와 방법으로 서술한 서적이나 영적 유산을 물려받았고 이를 통해서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기도를 배울 수 있으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수도회는 기도의 학교입니다. 

저희 수도회 회헌 37항 <창립자께서는 당신의 추종자들이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열망하셨고, 우리의 공동체들이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는 합당한 장소가 되며, 참으로 기도의 학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54항 <기도하는 사람이자 기도의 교사이기를 희망하는 우리들은 고독한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저 또한 이를 이렇게 sns를 통해 나누고 있습니다.  

         (6)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기도의 규범(=기준, 규칙)은 자유이다. 왜냐하면 기도  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발타살은 <기도>에서 이 점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각자가 그 자신의 관상의 형태와 과정에 관해서 준비하는가를 숙고해야 한다. 이는 자유의 원천아래 행해진다. 왜냐하면 노예는 율법의 종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내면을 자극하는 아버지와 함께 자유롭게 대화하는 자유인이다. 그는 타자로부터 충고를 받아들이고, 기도 안에서 위대한 자유를 즐기는 체험으로부터 유익함을 맛본다. 그러니 그는 항상 자유 안에 남아있다. 하느님의 성령은 기도하는 영혼 안에서 기도하고 마음 안에 들어와 아버지의 사랑을 그에게 증거하고 있다. 이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그에게 쏟아붓는 것이다. 성령은 자유이며,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약하게 하거나, 황폐화하거나, 질식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의 상호작용 안에서 궁극적 자유를 누리며, 이 자유로움을 잃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타인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사람(=기도 교사)은 기도를 배우려는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하며, 상대방의 자율을 손상하거나 저해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체험’을 나눌 수 있지만,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 기도하는 각 사람은 각자의 기도에 있어서 권위자, 주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서로에게서 기도의 방법 등을 배울 수 있지만, 기도의 주체는 본인입니다. 그룹 혹 개인은 각자의 상호 양성적인 기도의 방법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자신의 가장 고유한 기도 방법 등을 찾도록 제시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기도는 특별히 각자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체적인 조건, 성격이나 기질에 적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때론 기도할 때 자신의 종교적 감수성을 고려해야 하고, 또한 자신의 기도에 관한 과거 체험은 중요한 귀중한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할 때 개인의 습성이나 조건,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 하나의 방법만 시도하게 된다면 좌절감만 생기게 됩니다. 수련기 중에 저희 수도회는 수련자들에게 이냐시오 영신 수련 피정을 하게 되어 있는데, 가끔은 이냐시오 영신수련이 어떤 수련자에게 적합하지 않기에 피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기도 체험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의 방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방법으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가장 좋은 기도의 방법들은 우리가 지각하고 의사소통하는 다양한 방법들, 즉 우리 마음, 상상력, 감각, 느낌, 몸 심지어는 숨결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1. No Image 16Oct
    by 이보나
    2021/10/16 by 이보나
    Views 144 

    연중 제29주일 마르코 10, 35 – 45

  2. No Image 09Oct
    by 이보나
    2021/10/09 by 이보나
    Views 145 

    연중 제28주일: 마르코 10, 17 - 30

  3. No Image 03Oct
    by 이보나
    2021/10/03 by 이보나
    Views 216 

    연중 제27주일: 마르꼬 10, 2 - 16

  4. No Image 26Sep
    by 이보나
    2021/09/26 by 이보나
    Views 136 

    연중 제26주일: <마르코 9, 38 – 43. 45. 47 – 48>

  5. No Image 18Sep
    by 이보나
    2021/09/18 by 이보나
    Views 19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6. No Image 16Sep
    by 이보나
    2021/09/16 by 이보나
    Views 241 

    기도학교 강의 9: 루가 복음에 나오는 기도

  7. No Image 12Sep
    by 이보나
    2021/09/12 by 이보나
    Views 179 

    연중 제24주일: 마르꼬 8, 27 - 35

  8. No Image 04Sep
    by 이보나
    2021/09/04 by 이보나
    Views 200 

    연중 제23주일: 마르꼬 7, 31 - 37

  9. No Image 02Sep
    by 이보나
    2021/09/02 by 이보나
    Views 229 

    기도학교 강의 8: 기도의 열매

  10. No Image 29Aug
    by 이보나
    2021/08/29 by 이보나
    Views 141 

    연중 제22주일: < 마르코 7, 1 – 8. 14 – 15. 21 – 23 >

  11. No Image 26Aug
    by 이보나
    2021/08/26 by 이보나
    Views 269 

    기도학교 강의 7: Lectio Divina를 통한 기도의 단계 2

  12. No Image 21Aug
    by 이보나
    2021/08/21 by 이보나
    Views 160 

    연중 제21주일: 요한 6, 60 – 69

  13. No Image 19Aug
    by 이보나
    2021/08/19 by 이보나
    Views 251 

    기도학교 강의 6: Lectio Divina를 통한 기도의 단계 1

  14. No Image 14Aug
    by 이보나
    2021/08/14 by 이보나
    Views 143 

    성모 승천 대축일: < 루카 1, 39 – 58 >

  15. No Image 12Aug
    by 이보나
    2021/08/12 by 이보나
    Views 238 

    기도학교 강의 5: 하느님 말씀과 기도의 기본 구조

  16. No Image 08Aug
    by 이보나
    2021/08/08 by 이보나
    Views 151 

    연중 제19주일 : 요한 6, 41 - 51

  17. No Image 05Aug
    by 이보나
    2021/08/05 by 이보나
    Views 236 

    기도 안내 3. 호흡 감각 (드 멜로의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18. No Image 31Jul
    by 이보나
    2021/07/31 by 이보나
    Views 135 

    연중 제18주일 <탈16,2-4,12-15/에4,17-24; 요한 6, 24 – 35>

  19. No Image 29Jul
    by 이보나
    2021/07/29 by 이보나
    Views 256 

    기도학교 강의 3: 침묵과 들음

  20. No Image 24Jul
    by 이보나
    2021/07/24 by 이보나
    Views 133 

    연중 제17주일 <2열4,42~44/에4,1~6: 요한 6, 1 ~ 15>

Board Pagination Prev 1 ...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35 Next
/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