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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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대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바로 성령강림을 통해서 교회가 태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오순절 기사를 통해 교회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와 관심사는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 효과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의 3년 동안 함께 생활했음에도 살아 계실 때, 그분의 인격과 행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난 다음 비로소 제자들은 스승의 인격과 행적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제자들의 새로운 이해는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로지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의 인격과 행적을 바르게 비치어 나타나게 하는 영입니다. (사도2,33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요?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되돌아오셨기에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20,19)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2~23)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왜 성령을 통해, 용서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당부 말씀도 많으셨을 텐데! 사실 성령은 제자들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인도하시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용서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이 용서가 공동체의 바탕이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전제로 하지 않을 때, 또 이를 망각할 때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다음 첫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라고 말씀하신 까닭이 바로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친 제자들의 약함을 질책하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평화는 끝내 원한이라고는 품지 않는 마음이 있을 때만이 평화를 빌어 줄 수 있고, 또한 그런 평화로운 마음을 가질 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안부를 물음으로써 위로하시고 당신의 창에 찔린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바로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대한 확고부동한 사랑의 영원한 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육신을, 상처받은 몸으로 발현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대한 당신 사랑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증거이자 마음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분노나 복수가 아닌 자애로운 사랑에서 성령은 나옵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으로 살고자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성령께 마음을 비워 자리를 내어드리고, 앙심을 품지 않은 평화로운 마음에 성령께서 머무시고, 이 성령을 따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화답송의 찬송처럼 성령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는 생명 창조의 기능을 수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2,7~8)라는 표현은 모든 사람이 마음으로 통했고 한마음 한 몸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닫히고 폐쇄된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함께 화해와 평화를 불러일으키고 소통하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통해, 주님과 우리 서로를 일치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주님 사랑을 통해 폐쇄적인 우리 마음속에서 끝없이 솟아 나오는 생명의 물과도 같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이 고여 있거나 막혀 있으면 점차 썩어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물은 나를 통해 이웃을 향해 모든 피조물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총을 모두를 위한 공동선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1코린토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2,7)고 권고하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12,6) 
 
우리 모두 성령을 받았음에 감사하면서, 부속가 성령 송가에서 “성령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성령칠은 베푸소서.”라고 기도한 것처럼 성령의 일곱 가지 은총, 곧 구원의 신비를 알아가는 지혜, 믿음의 신비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통찰, 마땅히 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의견,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알 수 있는 지식, 악과 싸워 순교할 수 있는 용기,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공경, 하느님의 뜻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청합시다. 끝으로 성령 송가에서 영감을 얻어 토마스 키팅 신부가 만든 ‘성령께 드리는 기도’를 함께 바치면서, 성령강림 대축일을 보내도록 합시다.

<오소서 성령이여, 삼위일체의 깊은 신비로부터 당신의 빛을 보내시어, 우리 마음을 밝혀 주시며 그 빛을 좇도록 우리의 뜻을 굳혀 주소서. 마음이 가난한 자의 아버지시여. 오시어 이들을 당신으로 가득 채워 주소서. 당신은 선물을 주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 즉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나이다.

당신은 가장 좋은 위로자! 멋진 손님이여, 침묵으로 하시는 당신의 대화는 너무도 달콤하며. 당신의 위로는 참된 위로가 되며, 쓰다듬는 손길은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당신은 한순간에 모든 의혹과 슬픔을 쫓아내십니다. 유혹을 물리치려는 힘든 싸움에서 당신은 승리를 약속해 주십니다. 당신의 현존이 바로 우리의 승리입니다. 당신을 신뢰하도록 약해진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구슬려 주십니다. 자신을 굴복시키려는 크나큰 싸움에 당신은 우리의 안식이며, 우리 영혼 깊은 곳에 평화이십니다.

싸움의 열기를 당신의 숨결로 식혀 주시고 솟구치는 욕정을 달래 주시며 패배한 것처럼 보일  때 두려움을 가라앉혀 주소서. 눈물을 흘릴 때 눈물을 닦아주시고 양심 가책의 은총을        주시며 용서받을 희망도 주소서. 끔찍이도 행복한 빛이시여! 당신을 믿는 자녀들의 마음 밑바닥까지 당신의 빛으로 채우소서. 당신이 없이는 우리 안에 거룩한 생명도 아무런 덕도 없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숨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 영은 끝장입니다. 당신이 우리 입에 대고 당신 생명의 숨결을 도로 부어 주실 때까지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당신의 손길은 이슬방울같이 약하면서도 강한 손으로 붙잡으십니다. 가장 약한 산들바람같이 부드러우시면서 회오리바람 속에도 계시나이다.

거대한 용광로의 불길같이 우리의 기능들을 말라 버리게도 하시고,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주기도 하십니다. 겨울에 질풍이 낙엽을 휘몰아치듯 우리를 당신 앞에서 몰아내기도 하시고. 우리의 발길을 좁은 길로 걷도록 인도하기도 하십니다. 폭풍우를 몰아 폭우를 내리시어 우리의 죄를 씻어주소서. 소나기를 퍼부으시어 우리의 말라 버린 심장을 적셔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자국 난 상처를 어루만져 주소서. 당신께서만 주실 수 있는 그 신뢰감으로 당신을 신뢰하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일곱 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소서. 바로 당신 자신으로 우리의 덕을 갚아 주소서! 끝까지 참는 힘을 주시고 마침내 끝없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소서. 아멘>


     성령 강림 대축일(2): 요한 20, 19 - 23

오랜 세월 동방전례의 전통에서 살아오신 ‘이냐시오 드 라타키에’ 총대주교님은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는 현대 교회에 성령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잠시 들어볼까요?

<성령이 아니시면 하느님께서는 너무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며, 복음은 죽은 글자며 교회는 수많은 기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권위는 지배로 변하고, 선교는 선전이 되며 전례는 깡마른 과거의 추억이 되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의 윤리로 바뀐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온 세상이 부풀어 올라, 새 세상을 낳는 출산의 소리를 지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며, 복음은 생명의 힘이 되고 교회는 성삼의 친교가 된다. 권위는 자유를 낳는 봉사가 되고, 선교는 오순절 사건이 되며 전례는 과거를 되살리고, 미래를 끌어당겨 지금 여기에서 맛보게 하는 잔치가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활동이 된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불꽃 모양의 혀와 같은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배신에 따른 죄책감 그리고 유다인들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을 떨쳐 일어나, 복음 선포의 굳센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그 같은 힘을 주십사고 성령께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안일했던 신앙, 배신적인 삶, 비겁했던 복음 정신, 나약했던 믿음에 활활 타는 불꽃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성령 송가와 복음 환호성’에서 힘이신 성령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 주님,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행복의 빛’이신 성령님께서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비록 우리가 세속에 얽매여 신앙의 참된 진리를 증거 하지 못하고,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으로 위로받습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3, 17~18)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문을 모두 닫아걸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3)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왜 성령을 통해, 용서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당부 말씀도 많으셨을 텐데! 사실 성령은 제자들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인도하시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용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가 공동체의 바탕이요 토대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전제로 하지 않을 때, 또 이를 망각할 때,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고,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할 때 우리의 선포는 개인적인 치적이나 영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살다 보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움에서 연유된 것인지, 아니면 서로 받은 상처와 아픔, 분노와 앙갚음에서 연유된 것인지 모르지만, 마음의 문을 닫곤 합니다. 저 역시도 베트남에서 함께 살았던 필리핀 형제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을 때가 많았습니다.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인식 차이는 물론 공동체 생활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 그에 따른 삶의 양식이나 습관의 차이로 마음이 불편했고 힘들었습니다. 생각으론 ‘다름은 틀린 게 아니고 다를 뿐이다’고 알고 있었지만, 감정으로 동감하기엔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없는 상황에서 무려 5개월 동안 저와 그 형제만이 살아야 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시간이 저에게는 힘든 도전의 시간이었고 저 자신과 처절한 싸움의 기회였습니다. 저를 단련하고 정화시키는.

이런 상태는 하느님의 영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의 상태, 혼돈이고 사막과도 같은 황량함이고 어두움의 심연과도 같습니다.(창1,2참조) 이런 닫힘의 상황을 벗어나도록 이끄는 힘은 주님의 영에서만 나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준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창2,7) 화답송 후렴은 이 신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성령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는 생명 창조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닫힌 다락방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했던 것처럼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영적 갇힘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시는 힘이십니다. 

어느 시인이 이렇게 표현했다고 하더군요. 바다가 넓어서 배가 마음대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배가 다니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늘이 넓어서 비행기가 마음대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비행기가 다니는 길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생각도 자유스럽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마다 생각하는 길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드러내는 자신만의 생각의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없어 보이는 산길도 사람이 자주 다니다 보면 길이 나듯이, 사람도 역시 한 번 그 길이 뚫리면, 그 길로 생각하고 사유하게 됩니다. 용서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좁은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때때로 일상의 틀에서 한 번 벗어나 봐야 한다고들 합니다. 고정된 틀을 깨보는 것입니다. 나무 하나를 보기 위해서는 산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숲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산에서 멀리 떨어져 봐야 합니다. 서로의 관계가 풀리지 않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는 멀리서 바라보면 뜻하지 않았던 좋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한 걸음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 성령은 우리에게 소중한 생각을 주곤 합니다. 성령은 닫히고 폐쇄된 공동체에 죄의 용서와 함께 화해와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의 방향을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위해 자신의 영적 내면을 올바르게 정리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면, 그때까지 걸어온 길에 마음을, 미련을 두지 말고 기꺼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고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그때 평화가 새롭게 솟아오릅니다. 

성령은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통해, 주님과 우리 서로를 일치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주님 사랑을 통해 폐쇄적인 우리 마음속에서 끝없이 솟아오르는 생명의 물과도 같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이 고여 있거나 막혀 있으면 점차 썩어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물은 나를 통해 이웃을 향해, 모든 피조물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총을 모두를 위한 공동선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해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6-7).
 
성령의 일곱 가지 은총인 구원의 신비를 알아가는 지혜, 믿음의 신비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통찰, 마땅히 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의견,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알 수 있는 지식, 악과 싸워 순교할 수 있는 용기,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공경, 하느님의 뜻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기도드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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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요한 20, 1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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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루가 24, 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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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요한 18,1 - 19,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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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만찬 성목요일: 요한 13, 1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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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 제5주일: 요한 8, 1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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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특강 5: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남긴 말씀, 架上 七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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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 제4주일: 루카 15, 1~3.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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