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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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55장 낭독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이 표현은 단순한 전례 언어가 아닌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강생하시고 육화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처럼 하느님께서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우리네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불행이 너무나 가까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이 일로 결코 자포자기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대형사고 이후에 억울하고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합동 추도식을 보면 종교나 종파를 초월해서 조사에 한결같은 표현은 이제 눈물도 슬픔도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라는 기원 모두가, 다 우리의 희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삶의 부정보다 긍정의 힘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우리 희망의 요인이며 바탕입니다.

 

이미 와 계시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인생을 마구잡이로 살지도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비록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제대로 깨어 살고 싶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살고 싶지 않잖아요.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보다 앞선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우리 삶의 모델로 삼고자 하는 분들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 대림절을 살아가는 우리의 거울이자 모델은 동방박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동방박사의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누구였으며, 왜 그들은 그토록 멀고 먼 길을 순례하며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으며 아무런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이 경배하였을까요? (마태오 2, 1~12 낭독)

 

인간이란 본디 어떤 그 무엇을 찾고 있는 존재이나 아직 그 무엇을 찾지 못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끊임없이 어떤 그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동방박사들은 이미 자신들의 삶 안에서 어떤 그 무엇을 찾고, 기다리고 있었으며, 찾고자 하는 그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이 찾은 진리 앞에 겸손되이 경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신원은 박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 견해입니다. 어떤 점에서 요즘 박사란 때론 꽉 막힌 사람.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는 사람, 즉 부분은 잘 알지만, 전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당대 학문의 주요 관심은 동양(=중국)이나, 서양(=이집트)에서 점성술, 천문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연과 우주의 운행 및 질서를 연구하면서 시대의 징조나 현상을 이해하는 엘리트 그룹에 속했으며, 사회적 신분, 지성적 차원, 경제적 측면에서도 상위층에 속했기에 여유 자본이 충분했으며, 장기출장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없는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은 오늘 우리처럼 하늘에 있는 무수한 별들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었고 눈앞에 놓인 생계 문제에 급급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고상하게도 그 이상의 그 무엇을 추구하던 분들이었기 먼 길을 떠나오면서 귀한 선물을 소지하고 왔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서 왔을까요? 동방에서, 먼 곳에서, 아마도 그들은 페르시아나 바빌론 혹 아라비아에서 오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며, 하늘의 별의 움직임을 보고 유다, 예루살렘 및 베틀레헴까지 순례해 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진리에 대한 탐구와 새로운 징표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면, 그 먼 길을 순례했겠는가를 반성하면서 그들은 요즘 표현으로 실천하는 지성인,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동방박사는 곧 진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원형이며 모델입니다. 낡은 파라다임과 전통의 틀에 고착된 채, 진리를 외면하는 당대의 사람들에게나 현재의 우리에게 동방박사들과 같은 열린 마음을 갖고 진리를 찾아 나서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안주하려고만 하지 모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신앙이 그렇듯이, 사랑, 은총 혹은 진리란, 단지 머리로만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추구하고 탐구하면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체험 신앙을 바탕 하지 않은 지적인 주입이나 전통의 강요 된 신앙은 지속성이나 항구성이 희박하고 실천력이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신앙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하지 못하기에 낡은 관습에 젖어 살아갑니다. 인도의 어느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앉았을라치면 번번이 아슈람 고양이가 들어와 예배자들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루는 저녁 예배하는 동안 고양이를 매어 두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구루가 죽고 나서도, 구루가 매어 둔 고양이에 대한 아무 언급 없었기에 고양이는 묶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양이도 죽자, 또 다른 고양이가 아슈람으로 붙들려 오게 되었습니다. 저녁 예배하는 동안 격식에 맞게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관습적으로 저녁 예배 시간에 매여 있었으며, 어느 유식한 구루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모든 예배에 있어서의 고양이의 필수적 구실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썼다고 합니다. 마침내 훗날 사원을 방문한 사람들은 아슈람 고양이를 경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경배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해왔으니까 관습적으로!

 

이런 점에서 테르둘리아노는 <그리스도는 자신을 관습이라 부르지 않고 진리라고 불렀다. >고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의 경우처럼 관습은 때론 무의미한 행위이며 죽은 예식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내용 없는 형식은 허례허식일 뿐입니다. 이는 단지 예전의 일이 아닌 지금 우리에게도 늘 죽은 개념이나 이론, 낡은 전통에 익숙하고 이를 당연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앵무새처럼 답변만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소설)에 보면, 새롭게 부임한 교사 키팅은 학생들에게, <우리는 시가 좋아서 시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시를 통해서 인생의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고 학생들을 일깨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에 관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사셨던 삶과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그분이 바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며,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과 그분의 인격을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진리를 찾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우리 자신들의 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길에 들어섰고, 때론 그 길을 가면서 어려움을 만날지 모르지만, 끝까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들의 여정은 하느님 체험을 위한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요즘 관광은보는 관광에서 체험하는 관광으로 변화되어 가듯이 신앙도 단순히 믿는 신앙이 아닌 체험하는 신앙으로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신앙과 신학은 체험에 가까울수록 풍부해지고 진솔해지고 생명력이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체험은 인간이 여러 가지 장애와 위험과 유혹을 극복하고, 이전의 가설들을 확증하고, 그리고 기쁨과 고통을 통해 배움을 얻게 되는 수많은 지각과 접근 방실들의 종합이다.>고 정의하였습니다. 체험 Experientia이란 단어는 결국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서 내적, 외적 현실과 대결하고, 타인과 만나고 위험과 시련을 견디어 내고, 여행을 떠나고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떠날 때만이 ’체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 삶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결코 미리 완성된 것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은 종합되어야 하고, 길을 찾아야 하며, 어떤 의미 있는 기회가 발견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인간은 여러 가지를 시도해야 하고 또 시련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결국 체험은 단지 일종의 지식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젊은이는 사실 지적인 면에서 나이 드신 분들보다 아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삶을 통해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의 말이 더 힘이 있는 까닭은 단지 머리가 아닌 존재로 겪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분처럼 늘 상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만 한다면 이런 사람을 두고 흔히 ’꼰대‘라고 합니다.

 

동방박사는 바로 되어야 할 우리 자신입니다. 신앙의 길, 인생의 길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고, 또다시 시작할 뿐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다시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됩니다.

 

↓기다림 = 기다림(=인간존재) + 찾아오심(=하느님께서)

↓ 순례 = 다가감(하느님을 향해) + 기다림(인간을)

경배 = 인간의 경배 + 하느님께서 영광받으심

 

대림절의 주제이며 핵심인 기다림은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진 현실이 아닙니다. 무릇 모든 인간 존재는 본디 기다리는 존재이고,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런 기다림의 현실에 직면해서 새로운 전기, 전환의 돌파구로 삼고자 합니다. 거듭 태어남을 위한, 예수님의 탄생하심에서 우리의 영적 거듭 태어남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사야 40~41장 낭독)

 

하느님께서는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기 위하여 인간의 거부와 무시 속에서도 인내하시고 참으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철저한 무능과 무력 안에서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개인사를 보면 다 잘난 맛에 살 때, 매사가 잘 나갈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난 뒤 비로소 보이고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빛을 더 갈망하고,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희망을 갈구하고, 죽음이 목까지 차오르면 비로소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어둠 속에 살다 보면, 때론 사람은 빛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성서의 인물이 바로니코데모입니다. 니코데모는 바로 우리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 3, 1~21 낭독 >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시간은 한밤중으로 실제적인 시간이지만, 밤은 영적 현실을 상징합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 길을 걷는 것은 힘듭니다. 지금의 우이동 길은 예전과 달리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가로등이 없어 엄청 캄캄했고 길 또한 고르지 않아서 자칫 넘어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더욱 마음이 두렵고 발걸음이 빨라지며 그로 인해 숨도 턱까지 차다 보면 그 숨소리가 더 두려움을 가중하기도 했었습니다. 외적 어둠처럼 내적 어둠은 볼 수 없고(=보이지 않은 영적 길, 인생의 길), 그러기에 때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르기에 우리를 압박하고 힘들게 합니다. 악은 때론 이런 인간의 약함을 잘 이용합니다. 요한 3, 19절에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표현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빛-진리-생명을 추구하지만 나약함(=죄에 떨어질 수 있는 성향) 때문에 죄가 된다기에 고개를 돌릴 뿐 몸은 아직도 세상의 것들을 향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에 익숙하고 젖어 있습니다. 불편함보다 편안함, 불쾌보다 유쾌함에 익숙하고 고통을 싫어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외양적 차이는 잘 드러나지 않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태오 24, 40~41의 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들에 있는 두 사람, 맷돌질을 하고 있는 두 여자 가운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둘 것입니다. 판단기준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외양이 아니라 내적 태도의 차이, 삶의 시선과 지향에 따른 마음가짐의 차이라고 보입니다. 늘 깨어 준비하고 살아가는 삶이지요. 도통하는 길은 특별한 삶이 아니라 일상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깨닫고 행함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道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고, 그 도를 찾고 싶어 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젊은이는 아주 높은 산에 살고 있는 현자를 만나면 도를 깨우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떠나 마침내 그 현자를 만났습니다. 현자에게 젊은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도가 무엇입니까? 도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젊은이에게 “이곳까지 무엇을 따라왔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젊은이가 “몇 년을 걸어서 길을 따라왔습니다.”하고 대답하자 현자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가 따라 걸어온 그 길이 바로 도일세. 도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닐세, 자네가 길을 따라 걸어오면서 만나고 부딪치고 했던 모든 것, 사랑하고 헤어지고, 밭을 일구고 달구지를 몰던 그 모든 것이 바로 도일세. 그 안에서 도를 찾지 못한다면 어디 가서도 도를 찾을 수 없는 것일세.> 결국 이 이야기에서 日常卽道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는 일상적인 일들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깨우치신 도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깨달음을 얻기까지 나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렀다. 깨달음을 얻고 나서 나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마태오 25, 1~13의 예화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이겠지만 곧 신랑이 빨리 오든 더디 오든 상관하지 않고 일상에서 늘 준비하고 살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꺼이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은 깨어 살아 온 삶의 결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 하는 존재의 태도, 작은 사랑으로 많은 일을 하기보다 큰 사랑으로 작은 일에 몰두하는 게 낫습니다.

 

이는 곧 신앙인은 마치 <~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바로 주님의 오심을 늘 깨어 살아가고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표지라고 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3, 11~ 14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처럼 살라! 대낮처럼 살라, 부자는 가난한 사람처럼, 가난한 사람은 부자처럼 살라. 이렇게 ~처럼 살아갈 때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며,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살아가면서 자기의 길을,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1코7, 29~31에서도 동일한 정선율이 울려 퍼집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은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께서 인간의 나약한 육신을 취하고 오심은 사람을 단죄나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2코8,9) 이렇게 오시는 그분을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깨어 준비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살아야 합니다.

 

안도현은 <연어>라는 동화에서, 인간의 살아가는 이유는 단지 존재하는 그 자체이며,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그 존재 자체로 나 아닌 모든 사람과 자연의 ‘배경’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배경이 되시기 위해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참된 자세는 한 마디로 기다림의 삶과 기다림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누구나 그 무엇을 기다리는 존재이며, 인간의 삶은 기다림입니다.

1) 기다림은 거부될 수 없는 인간의 현실이며 실존입니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전 생애가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2) 기다리는 순간은 자연히 생활 리듬을 단절하고 중단하기에 부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짜증과 초조함, 무료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불편한 느낌이 강합니다. 미국 유학가서 제가 맨 처음 배운 표현 하나는 “enjoy yourself!”라는 표현입니다. 기다림마저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창조와 안식의 의미를 깨달을 때만이 기다림이 지루함이 아니라 기쁨임을 알 수 있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식당이고 어디에서든지 ‘빨리 빨리’에 젖어 살아온 한국인의 습성은 기다릴 줄 모르고 즐길 줄 모릅니다.

3) 기다림이 지연되면 걱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인간의 한계상황 초월에 따른 무능력과 자괴감으로 말미암아, 조절 능력 상실에 따른 긴장과 걱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술방 앞에서 기다리는 보호자들, 대학입시 시험을 기다리면 초조한 학부모들... 저는 시간 약속에 철저한 사람이기에 약속 시간이 늦어지면 불편하고 분노와 함께 무시받은 느낌이 강하기에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기다리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본디 기다리는 존재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근본적으로 기다리는 삶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바로 기다림의 바탕입니다. 기다림은 인간 실존이지만, 성경에 드러난 성서의 인간은 한마디로 기다림의 존재이고,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다림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단지 외적 시간의 지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이를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절박한 희망과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약속을 의지하여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이집트와 바빌론 유배를 통해서 더 심화되었고, 신약에 와서 루카 복음 1, 13. 31절의 즈카리야와 마리아는 그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들을 기다리게 하는 어떤 약속을 받았습니다. 자라나기 시작한 씨앗처럼, 자신들의 존재와 삶 안에서 시작된 그 무엇을 약속받았지요. 이게 중요합니다. 기다리는 그 무엇이 이미 시작되었기에 진정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약속을 소유하고 살았습니다.

 

** 아브라함 우르를 떠남과 버림의 바탕은 약속에 대한 믿음, ‘믿음의 조상’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약속은 그들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 ‘인간시대’라는 프로그램에서, 경기도 포천의 팔순의 연세에도 시를 쓰는 할머니는 매주 화요일마다 자신을 찾아온 딸의 약속을 믿고 살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이처럼 기다림은 힘입니다.

** 약속에 길들여진 우리, 게임에 익숙한 우리들은 때론 속임일지라도, 그 약속을 믿고 잠들 때가 많았습니다. 곧 올게! 이적의 노래 ‘거짓말’처럼 우리는 그렇게 거짓 약속에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성경의 인물들은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기다렸습니다. 조바심에서가 아닌 약속에 대한 철저한 믿음으로 기다리며 사셨습니다. 자신들의 삶 안에 이미 씨가 뿌려졌고 무언가 시작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게 기다렸던 지혜로운 동녀들처럼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2) 기다림은 약속을 의지하여 희망으로기다리는 것입니다.인간은 근본적으로 매우 구체적인 어떤 것을, 소유하고 싶은 그 무엇을 기다리는 경향이 강하기에 불확실한 기다림을 힘들어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기다리는 대부분의 기다림은 욕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따뜻했으면 좋겠다. 고통이 그치면 좋겠다.” 이와같은 바램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램이 욕구와 뒤섞여버리면 폐쇄적이 되고 힘들어집니다. 바라는 바를 성취하려고 덤벼들고 이루지 못하면 낙담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합니다.

 

희망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탄광에 갇힌 탄광 광갱들에게는 출구가 없다는 사실은 절망이며, 절망은 곧 죽음입니다. 하지만 살아날 희망이 있다고 믿고, 구출을 확신하면 그날을 희망으로 기다릴 수 있겠지요. 2010.10.13일 칠레에서 700m 지하갱도에서 69일 만에 구출된 33명의 광부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겠지요. 서로 격려하고 배려하면서 구출해 주겠다는 약속을 의지하여 희망으로 기다린 결과 그들은 기적을 만들어 냈잖아요. 기다리는 자체가, 버티는 자체가 바로 희망입니다.

 

욕구에만 집중하면 이내 절망하기 쉽습니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고 관심을 갖다 보면 자신의 욕구에서 자유롭고 될 때 정말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욕구가 아닌 희망을 가득 안고 기다렸습니다.

 

3) 기다림은 함께 기다려야 합니다.루카 1, 39~56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약속 이후 두 분은 만남을 통해 힘을 얻게 되었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동질감 그리고 연대감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부 심정 홀아비가 안다고 하듯이 두 분이 함께 했기에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기다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원형입니다. 함께 기다리면서 서로를 지지하고 북돋아 주며 긍정해주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경험적으로 심각한 문제 앞에 함께 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배우게 됩니다. 아픔이나 슬픔을 함께 할 때 그 아픔도 슬픔도 작아지고 견디어 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표현처럼 함께 아픔을 슬픔을 나눠야 합니다. 예전 물대포로 말미암아 백남기 형제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분의 딸은 힘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함께 해 주십시오”라고 눈물로 호소하더군요.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약속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이며 힘의 원동력입니다. 전례와 기도 시간은 바로 약속을 중심으로 함께 모인 것입니다. 특별히 성찬례는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고 함께 감사하는 시간이며 공간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지요. 기다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었으니, 오늘 저는 성경의 기다린 인물 중에서 구약에서 두 분을 대표적 사례로 인용하고 싶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힘들 때 자주 읽는 성경 부분입니다.

 

첫째, 창세기의 요셉입니다. (창39~50장 참조) 그는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사실 살다 보면 형제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입니다. 이는 부모의 편애가 이를 자극하게 만듭니다. 아무튼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가서 간수 대장 포티파르의 신뢰를 받지만 포티파르 부인의 유혹을 거절함으로 감옥에 갖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파라오의 시종들과 만나게 되고 마침내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게 되고, 그 해결책을 타개할 전권 부여받게 되잖아요. 그 시간이 무려 13년 동안이나.... 人間之事 塞翁之馬라고 하듯이.

 

모든 일은 다 그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를 앞당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며, 인생을 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악과도 평온하게 지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은총입니다. 좋은 일 나쁜 일이 어디 있나요. 그러기에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묘하게 하신 일들 마음에 품어 생각하라!!> 창세기 50,20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로마서 8,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기에 세상 살면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지둘러야’ 합니다. 기다리는 존재는 무릇 방정맞은 사람이 아닙니다. 무겁고 진득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둘째, 다니엘입니다. 그는 정복자의 나라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갑니다. 그런 열악한 곳에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살아갔으며, 그의 성실함과 비범함이 이내 드러납니다. 내시부 대신의 시종이 되고, 네브카드네자르 왕의 꿈을 해몽하게 됨으로써 그의 총애와 함께 신임을 받게 되지만 많은 이들의 질투와 시기 그리고 음모를 겪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다니엘서 6.11절에 보면, 그는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하루에 세 번이나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드렸는데 이는 임금님의 금령에 위반된 행위였습니다. 적대자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가운데에서도, 타국 땅에서 흔들림 없이 그 문화에 적응하고 안주하기보다 유다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신앙과 자기 정체성을 버리도록 위협하고 협박당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삶의 뿌리와 고향을 잃지 않도록 부단하게 기도하며 노력하였습니다. 다니엘처럼 우리 역시 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낯선 이방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현실과도 같습니다. 세속화된 세상에서 자아 상실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상실될 위협과 회유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은 하느님이 아니 계신 듯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은 계시다.>는 믿음을 견지하면서 살아가기 위해 기다림은 물론 이제 다니엘처럼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지 기다리기보다 깨어 기다림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제 개인적 체험이지만 저는 거의 7~8년마다 심장박동기 시술을 받아야 했고 이미 6차례나 교체했습니다. 시술은 마취한 상태에서 하게 되는데, 회복실에서 시간을 보낸 다음 마취에서 ‘깨어났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곧 제정신이 들었다는 표현입니다. 온전한 정신을 회복했다는 표현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때론 눈감고, 귀 막고 입 막고 살아가야 합니다. 마치 마취상태처럼, 잠든 상태로 살아갑니다. 잠듦은 현실과의 괴리 또는 결별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며 기다리라고 당부하셨지만 잠들 수밖에 없는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1데살로니카 5, 6절에 잠을 자지 말고 깨어있도록 권고하면서 덧붙여서 정신을 차리라고 합니다. 이는 곧 정신이 맑아서 어떤 것에 유혹되지 않고 혼란을 겪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잠들고 싶은 세상에서, 잠듦으로 말미암은 단절과 괴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길입니다. 잠듦에서 일어나는 것은 세상과 다른 삶의 자세로 살아간다는 의미이고, 대낮처럼 살아가는 자세를 지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믿기에 별짓 다하며 살아갑니다. 대림은 바로 깨어나는 시기이며, 깨어 사는 시기입니다. 세상이 온통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깨어 살고자 다짐합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그분과 단절하고 있다면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대낮처럼 살아가는 삶이란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제 깨어 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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