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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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심을 깨어 기다림과 기다리시는 그분에게로 향한 순례의 끝은 주님과의 만남과 경배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참된 경배로 귀결됩니다. 경배敬拜(=경의나 공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공손히 절함. 신이나 높은 사람을 숭배함)의 사전적인 의미처럼 겸손하게 그분께 깊이 절하는 것입니다. 참된 자기 앎은 겸손이고, 겸손은 바로 참된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분께 깊이 무릎 꿇고 절하게 됩니다.

 

이처럼 기다림의 순례는 하느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고, 이 만남을 통해서 자신은 길도, 진리도, 생명도 아니라는 자기 한계와 참된 자기 앎으로 이끌어 줍니다. 다만 자신은 길을 찾고 걷는 존재, 순례하는 존재일 뿐이며, 아직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나그네라는 사실뿐입니다. 또한 진리가 아니기에 참 자유를 목말라하는 존재이고, 충만한 생명을 누리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합니다. 어쩌면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소리가 아닌 하느님의 소리를 전달하는 스피커, 확성기일 뿐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3,16)고 고백한 세례자의 요한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이런 고백의 자연스런 결말은 진정한 경배로 이어집니다. 경배는 내적인 마음가짐과 외적 태도로 드러나기 마련이기에 하느님을 공경하여 공손히 절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빛이요 생명이신 존재 앞에 무릎을 깊이 꿇고 그분께 경배하러 나가야 합니다. ‘깊이 무릎을 꿇는다’는 표현은 성무일도 아침 찬미가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깊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저는 2002년 처음으로 메쥬고리아를 방문했을 때, 아빠를 따라 먼 길을 순례해 온 어린아이가 넓은 광장에서 거행한 성체강복을 할 때 무릎 꿇음에서 보았습니다. 물론 풀밭에 오래도록 무릎을 꿇었지만, 그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겸손한 몸과 마음으로 ‘깊이 무릎을 꿇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경솔하게 꿇음 혹은 건성으로 꿇는 게 아니라 참으로 겸손하게, 공손하게 <아기 예수님>께 깊이 꿇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형식처럼 느껴지던 것이 다시금 보이고 느껴졌습니다. 곧 의식, 예식은 단지 행위 그 자체만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의 표현이며 표출입니다. 몸의 기도와 경배는 마음과 통합니다. 그러기에 몸을 잃으면 마음도 잃게 되기 마련입니다.

 

한편으로 모든 세상의 중심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존재,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로 태어나시어 구유에 누워 계신 예수님께>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깊이 절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베틀레험의 탄생 성당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자리에 가려면, 상징적이지만 계단을 통해 내려가야 하고, 좁은 통로를 지나가려면 본의 아니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이를 통해 제가 느낀 점은, 겸손은 겸손하고 싶다고 해서 겸손해지는 게 아니라, 인간 실존이,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시고 가난해지신 것처럼 그런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선 우리 역시 그렇게 낮아지고 가난해질 때, 그분께 경배할 수 있을뿐더러 그분의 강생과 육화하신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난 자리에 도달하는 과정이 그렇듯이 구유 앞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무릎을 깊이 꿇어야 합니다.

 

동방박사는 유다인들의 경직성과 배타성 및 아집을 질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득권층의 집착과 자만. 그에 반해서 동방박사들은 체면이나 위신보다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듣고 유다인들은 가슴을 찢고 회개했어야 할 텐데 오히려 자신들의 어둠을 은폐하려 폭력을 휘두르고, 무죄한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경직성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러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든 세상의 중심으로 자부하던 인간이, 무력한 아기 예수에게 깊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은 그분을 참된 주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 신앙의 고백이며, 그분께 선물을 바치는 것은 그분처럼 다함 없는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이며 고백이라고 느껴집니다. 동방박사들의 선물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당대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선물의 내용물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값진 것은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훨씬 더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선물은 단지 눈에 보이는 보물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인 자기 자신을 되찾음, 회복이야말로 하느님의 눈에 가장 귀한 선물이며 보물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보시기에 참된 선물은 기다림과 순례를 통해서 마련됩니다. 진정한 경배와 선물은 오히려 그분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을 행함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루카 15장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왔을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오히려 <죽었던 아들이 돌아온 그 자체>가 아버지에겐 가장 고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께 드릴 선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주님의 성탄으로 거듭나고 새로운 존재와 삶으로 살겠다는 우리의 마음가짐 하나면 충분하고도 충분합니다.

 

예전에 엄마 돌아가신 다음, 제 엄마의 사물함에는 제가 중학교 수학여행 다녀오면서 사다 드렸던 브롯찌와 신학생 때 어머니 날에 사서 보내 드렸던 골무, 제 사제서품 초대장과 기념 상본 그리고 미국 유학 중에 보내드린 50$ 화폐 등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하찮은 선물이었지만 엄마에게는 귀한 선물이었기에 그렇게 오래도록 고이 간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선물의 가치는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럴 때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쁨입니다. 예수님 또한 당신의 탄생을 축하하는 선물도 그런 마음의 표현이기를 원하고 기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동방박사와 같은 마음으로 거듭날 때 진정한 순례는 그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이며 그때 참된 경배가 이루어질 것이고 예수님께 드린 선물은 참된 경배의 절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방박사 혹 3왕 내조의 이야기는 이미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순례자가 있었다는 이야기 또한 들어보셨고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는 <넷째 왕의 전설>은 뒤늦게 주님의 오심을 향해 순례하고 경배하러 가야 하는 우리의 자신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가 이 대림과 성탄의 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살면서, 삶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긴 이야기이지만 <넷째 왕의 전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기 예수를 예배하러 왔던 동방박사들은 ‘멜키오르, 가스파르, 발타자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들 세 사람 이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그 네 번째 사람의 이름은 ‘알타반’이라고 합니다. 알타반 역시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모든 가산을 다 팔고 아주 귀한 보물 세 가지 즉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에메랄드를 구세주께 드릴 선물로 샀다고 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 가기 위해 세 동방 박사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여관주인에게 그 사람을 부탁하며 경비로 써달라고 사파이어를 주었습니다. 그가 구해준 그 유다인은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팔레스타인으로 가려는 목적을 듣고 그가 알타반에게 축복을 빌어주며 그가 만나 보려고 가는 메시아는 베틀레헴에 탄생하실 예정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알타반은 약속된 장소에 너무 늦게 도착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출발한 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자 베틀레헴까지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정말로 신비로운 한 아기가 태어났을 때 천사가 불렀다는 노래 등을 알게 되었지만, 아기의 부모는 그 아기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알타반은 외아들을 데리고 혼자 사는 가난한 과부의 집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이웃집 사람이 달려 들어오더니 헤로데의 군인들이 자기 아들을 죽였으며, 지금도 읍내에서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있다고 울면서 말하였습니다. 알타반은 과부에게 꼼짝하지 말고 집 안에 있으라고 말한 다음 밖으로 나가 빗장을 질렀습니다. 칼을 빼든 군인들이 그 집안으로 닥아오는 것을 보자 그는 군인에게 루비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 집에 손만 대지 않으면 이 루비를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 집 주인인데, 내게는 아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보석이 탐난 군인은 보석을 받고 가 버렸습니다. 알타반은 그래도 아직까지 구세주로 태어나실 분에게 드릴 보물이 남았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렇게 삼십 년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알타반은 그분을 찾고 있었음에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선지자이며 선한 일을 많이 베풀던 분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갔는데 이미 그분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베틀레험에 탄생하신 그분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다는 죄목으로 지금 골고타로 끌려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알타반은 자기가 그분의 별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확신하고는 갈바리아로 달려갔습니다. 늙은 박사에게는 이제 단 하나의 보석만이 남았습니다. 이 귀한 보석을 형리에게 주어 그분을 자유롭게 풀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그는 노예시장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어린 소녀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절 구해주세요.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내가 믿는 이 종교가 제게 순결을 가르쳐 주었는데 저는 지금 수치와 죄악에 가득 찬 삶으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이를 듣고 알타반은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을 위해 남겨 두었던 마지막 이 보물을 이 소녀를 위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는 에메랄드로 그 소녀를 구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갑자기 온 천지가 캄캄해지고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알타반이 피해 있던 집이 무너지며 그는 허물어진 집 밑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어 가면서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주어 버리고 그분께는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음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네가 나의 어린 형제자매들에게 무슨 일을 했든지 그것은 다 나를 위한 것이었다. 와서 내가 세상 처음부터 아버님께서 너를 위해 예비해 둔 왕국을 물려받아라.” 알타반은 그렇게 죽어 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넷째 왕과 같은 처지일지도 모릅니다. 이 전설을 들으면서 진정한 순례와 경배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으리라 믿으며, 삶 자체가 바로 가장 값진 선물이며 예물입니다. 이 성탄의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선물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온 사랑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고 반기는 선물은 바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입니다.> 대림 시기와 성탄 시기는 우리로 하여금 거친 광야를 거슬러 질러가는 순례 여정을 통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참된 자신으로 이 길을 걷고 살아야 하는 가를 깨우치는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인생의 해답을 찾기까지 부단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의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신이 바로, 자신의 삶이 바로 주님께 드리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김의 삶을, 봉사 받기 위함이 아니라 봉사하는 삶을, 자신의 만족을 위함이 아니라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 남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삶을 사는 게 바로 자기답고 자유로운 삶이며 이런 삶이 참으로 축복받은 삶입니다.

 

묵시록 2, 29절에 <나의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자에게는 내가 샛별을 주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샛별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 본 샛별로써 묵시록 마지막 장 22, 16절에서, <나는 빛나는 샛별이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어둠 가운데서 하느님을 충실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다.>고 하신 그분의 광채를 받을 것입니다. 사실 예전 순례하는 여행객들에게 샛별은 방향 확인과 희망의 표지입니다. 아주 웃픈 이야기입니다. 예전 저는 형제들과 함께 파푸아 뉴기아의 파스팍 모임에 참석했을 때, 지금은 환속한 형제가 왜 북두칠성이 보이지 않으냐고 하더군요. 아마도 그는 현인의 <남쪽 나라 십자성>이란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거나 지리 시간에 잠을 잤을 것입니다. 남반구에선 십자성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시리아 고사본에 6세기부터 전해오는 한 장식화에 의하면, 강도를 만난 쓰러진 사람에게 몸을 숙이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을 묘사한 그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 위에 환히 비추는 별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즉 땅에 쓰러져 죽어 가는 그 사람에게 생명과 사랑의 샛별이 떠오름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성화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만이 아니라고 봅니다. 자비로운 사마리아 사람은 누구일까요? 쓰러진 인간(=아담, 죄에 빠져 쓰러진 인간)에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제(=율법)도 레위(=예언)도 도움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게 인간의 현실이고 실존입니다. 이때 그분이 다가오신 것입니다. 위에서 와서 밑으로, 아래로 내려오신 그분만이 도움을 필요한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시며 위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초주검이 된 이에게 다가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루10,34) 이처럼 성탄은 그분처럼 흠 없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남을 살리는 삶을 통해 세상의 빛으로 거듭나는 시기입니다. (필립2.15) 또 다른 동방박사나 사마리아 사람으로 거듭날 때 진정한 순례는 그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참된 경배로 그 순례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참으로 잘 깨어 기다리셨으며, 거친 내적 광야를 주저하지 않고 통과해 오셨고, 깊이 무릎 꿇으셨습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일본의 미쓰하라 유리라는 분이 쓴 시 <길을 만든 사람들>을 낭송하고자 합니다. 봄길과 잘 어우러지는 시입니다. <맨 처음 길을 걷는 사람 훌륭해 험한 길 처음으로 걸은 사람 이름을 외울 가치가 있을 만큼 훌륭해 그 오롯한 자세 정말 아름다워. 허나 그 뒤이어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길을 밟아 다지며 걸어간 이들의 소박한 걸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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