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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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누구나 어느 순간 어느 때든 어디서든지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백화점에 가서 다양한 유형과 색깔들의 옷을 앞에 두고 어떤 옷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거나, 음식점에 갔는데 메뉴판에 다양한 메뉴들을 보고 어떤 음식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며 쉽게 선택하지 못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물론 선택은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이른바 ‘결정장애’를 겪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결정장애’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결정장애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에서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대사를 남겨 훗날 ‘햄릿 증후군’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고 그저 머뭇거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선택하지 못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를 오늘 복음의 여러 사람의 모습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듯이 우리는 세속적인 것에 묶이지 않고 주님을 선택하고 주님을 충실히 따라갈 수 있는 용단이 필요합니다. 

때가 차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들을 예감하고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와 비장한 마음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착잡한 심정을 자극하는 일이 바로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는데 한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9,54) 하고 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 상태를, 곧 닥칠 주님의 수난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배척과 거부는 예수님의 운명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상황은 제자들에게나 우리에게도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숙고해야 하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미움과 배척과 거부를 받아들인다는 선택이며 결정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후,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9,5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복음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9,58) 이 말씀은 그 사람에게 당신을 따름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 투철한 각오와 결심을 품고 따르라고 그 사람에게 그리고 당신을 따르려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저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삶인지 잘 모르는 채, 영세 후 2년 만에 수도회 지원자로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입학 당시 저와 제 동기들은 일반 고등학교나 대학 출신이었기에 예과라고 불렀으며, 총 17명이었습니다. 그중에서 끝까지 남아 사제서품을 받은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2명뿐입니다. 사실 주님을 따름은 출발에서부터 끝까지 결단코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름은 출발부터 단호해야 합니다. 그분을 따르는 길은 힘들고 어려운 여정을 의미하며 이는 마치 여우나 새들과 같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각박한 삶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겐 “나를 따라라.”(9,59)하고 초대하였지만,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9,60)라고 즉각 따를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육체적으로 죽은 것을 죽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파르나움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라자로가 죽었을 때도 “잠자고 있는 라자로를 깨우러 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다운 죽음이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고 영혼이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고 하실 때, 첫 번째 죽은 자들은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나타내고, 두 번째 죽은 자를 장례 치르는 죽은 자들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일을 우선해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곧 죽은 자들과 같습니다. 이는 곧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아버지의 장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영원한 생명이 달린 문제니까요.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9,6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쟁기에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9,62)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는 하느님 나라는 차선이 아니라 최우선임을 재차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겐 희망의 총체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려고만 합니다. 소금 기둥이 되었던 롯의 아내처럼 말입니다.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하고 애착을 끊어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까닭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형제 여려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갈5,1.13) 우리를 주님께서 부르신 까닭이란 바로 세상적인 가치에 묶이고 눈멀고 억메이지 않은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고 강조하십니다. 노예와 같은 삶이 아닌 바로 자유로운 삶,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부르심입니다. 이는 율법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과 삶을 따라 살아가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주님의 부르심은 육의 욕망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받아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자유롭게 살라는 초대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유를 향한 초대의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한 자유를 살기 위해서 현세적 가치들을 철저히 상대화함으로써 복음적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따름은 모든 이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오직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기 위하여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육을 거슬러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교황 주일이기도 합니다. 교황님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이시며, 우리의 영적 지도자이시자 사목자이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으로 선출되신 후 첫 축복을 내리시기에 전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며 신자들 앞에 고개를 숙였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부탁처럼, 교황님께서 교황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해나갈 수 있도록 오늘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교황님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요한 23세 교황님의 일화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날 교황님께서 보이지 않으셔서 비서가 방이란 방은 다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기도실에 앉아 있는 교황을 발견했습니다. 비서 신부가 교황에게 기도실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무엇을 했냐고 묻자 교황이 대답했습니다 . “거기 그냥 앉아서 말했지. ‘당신은 여기 계시고 저도 여기 있습니다!’” 비서가 물었습니다. “다른 기도는 안 하셨습니까?” 교황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말은, 한 마디도 안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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