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22.03.17 07:53

사순절 특강3: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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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도자의 이야기입니다. 여동생이 마리아란 딸을 두고 죽었고, 조카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에 수도자는 암자에 방을 마련해서 함께 살았습니다. 기도를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면서, 때가 되면 수도자가 되길 희망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 수도자가 암자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수도자는 마리아에 대해 흑심을 품고 마리아를 유혹해서 함께 잠을 잤습니다. 뒤늦게 마리아는 후회와 자책으로 암자를 떠나 창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노인 수도자는 조카를 찾기 위해 조카가 있는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손님으로 가장하고 유곽에 들어가 마리아의 모습을 설명하고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마리아는 사막의 향기를 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그 수도자는 입맞춤하는 시늉을 하면서 “마리아야,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통곡하면서 마리아는 왜 이런 삶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뒤 수도자는 “마리아야, 네 죄를 내게 다오. 하느님께서 네 모든 죄를 나에게 돌리시기를! 그러니 이제 나와 함께 돌아 가자구나. 제발 간청하니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하지 말아다오.” 그러고 나서 수도자는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듯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죄란 단지 인간 존재의 일부일 뿐이고, 실은 우리의 잘못을 고치고 바로잡는 게 우리의 진정한 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로써 마리아는 삼촌의 말을 믿게 되었고 돌아가서 이전의 생활을 되찾고 하느님의 용서를 맛보면서 자유를 주는 지혜를 얻게 되었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돌아가신 저희 수도회 박도세 신부님은 ‘죄란 그렇게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회개를 통해서 그리고 용서받음으로써 우리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됩니다. 겸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겸손하지 않은 것,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를 짓고서 죄인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회개하기보다 자신의 죄와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소외와 고립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과도 단절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죄인은 예전처럼 하느님께 의존하기를 원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스스로 소외시키고 스스로 안에 갇혀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 아오스딩은 죄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셨습니다. “오 복된 죄여!”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는 죄는 길을 찾고, 고향을 찾고, 잃었던 자신과 아버지를 되찾는 기쁜 죄, 복된 죄입니다. 그러기에 헨리 뉘웬은 ‘하느님의 무죄함에로 부르심’에 관해 강조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늘 죄인들의 피난처인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불림 받고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되돌아 온 아들의 발을 씻겨 주신 아버지처럼 인생을 걸어오면서 묻은 오물, 먼지를 씻어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십니다. 미사 감사기도에서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들을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말씀하심을 통해 매일매일 죄인을 초대하시고 죄를 씻어 주십니다.

 

용서받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강력하고 본질적인 인간의 영적 체험입니다. 이 체험을 통해서 용서받은 사람은 보다 나은 인간이 되게 하고, 자신과 이웃을 예전보다 더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받습니다. 용서받음으로써 지난 모든 악행과 마음의 가책을 깨끗이 닦아내면서 새로운 가능성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인생이나 영적 여정의 모든 단계에 중요한 전환의 발판을 마련해 줍니다. 영적으로 진보할수록 용서받을 필요성이 감소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비나 용서란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죄는 더 선명해지고 뚜렷해집니다. 촛불의 거리에 따라 사물이 더 밝게 또는 흐리게 보이듯이 말입니다. 즉 빛이신 하느님께 더 나아갈수록 죄는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를 더 깊게 체험합니다. 영적 여정의 특징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한 걸음 뒷걸음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용서가 필요합니다. 성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더욱 더 의존하였음을 본보기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하느님 자비의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죄한 분이셨지만 죄인이 되시고, 죄인의 아픔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다 내게로 오라.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1,18) 하느님께서 죄인을 부르시는 것은 인간의 비참함의 표시이겠지만, 하느님 편에서는 자비의 표시입니다. 자비를 통한 재창조하기 위해 과거에 지은 죄를 묻지 않고 용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사실은 ‘내가 하느님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찾도록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큰 숲 가까운 곳에서 아빠와 함께 살고 있던 호기심 많고 모험심이 강한 소녀가 혼자 숲으로 들어갔다가 너무 깊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소녀는 불안했고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은 딸을 기다린 아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결국 아빠는 딸을 찾아 숲을 뒤졌지만 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아빠는 더욱 샅샅이 숲을 수색했습니다. 그렇게 아빠가 딸을 찾기 위해 애간장이 녹아가는 동안, 몇 시간 동안 숲을 헤매다 지친 소녀는 숲속의 한 공터에 다다랐고 거기서 커다란 바위 위에 웅크리고 앉아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쯤 소녀의 아빠는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돌아오지 않은 딸을 찾기 위해 다시금 숲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늦은 밤이 찾아오자 많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소녀의 아빠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아오기까지 밤새도록 아빠는 딸을 찾아 숲을 헤맸습니다. 새벽녘 첫 빛줄기 속에서 그는 공터 한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잠들어 있는 딸을 보았습니다. 딸의 이름을 부르며 정신없이 뛰어갔습니다. 소녀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볐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달려 온 아빠를 끌어안으며 소리쳤습니다. “아빠, 드디어 아빠를 찾았어요!”

 

하느님의 눈길로 보지 못하면 우리는 낡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자신에 대한 자학과 자기연민에 쉽게 빠집니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는 ‘떠나 온 자리로 복귀하면서 자신의 헛수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과거의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이었고, 부질없는 것이었으며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나 참된 자기 부정은 곧 자기 긍정으로 전환입니다. 이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보여 준 회개의 모습입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15,19)하고 인정하고 난 뒤,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이렇게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랑이신 아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을 알고 되돌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사랑할 만한 나를 사랑하시지 않고 사랑받을 수 없는 나를, 사랑받지 못할 나를 사랑하십니다.(로5;8참조)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있는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스스로 만든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스스로 만든 神像 안에 숨기보다 자비하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게 가장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의 고백입니다.

 

저는 일본 나가사키 성당에서 1981년 2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나서, 제 출신 본당인 순천 저전동에서 3.1일 첫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런데 첫 미사를 봉헌하는 날 아침, 저의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방문을 열었더니 제 어머니가 제게 ‘신부님 고백성사를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제가 되어 첫 고백자가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라니, 이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다음 이 일이 제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알게 되었지만, 그땐 정말이지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눈물 흘리며 고백하는 엄마와 엄마의 고백을 듣는 저 역시도 눈물 속의 고백 성사였습니다, 흔히들 고백성사 보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든 고백 성사의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자신이 낳고 기른 자식에게 누군가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그 순간 제 어머니에게 있어서, 저는 당신의 자식이 아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의 대리자인 사제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엄마의 고백을 듣는 저에게 하느님은 또 다른 은총을 제게 베풀어 주셨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저와 엄마만이 아는 저의 일탈입니다. 예전엔 지금의 아이들처럼 매달 용돈을 주고받는 시절은 아니었잖아요. 어린 시절, 저는 아주 가끔 엄마의 비밀 창고에서 아주 작은 돈을 훔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 일을 엄마는 전혀 모르실거라고 판단했지만, 훗날 제가 한 일이 드러나고서 알게 된 사실은, 엄마는 알면서도 단지 모른 척 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어린 저에게는 제법 큰돈을 훔쳐 다 쓰고는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를 기다리고 계신 엄마를 보는 순간 무서워서 문을 닫고 냅다 도망쳤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저는 어둠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엄마 품에 뛰어들어 안겼습니다. 엄마는 제게 아무런 꾸중도 매도 때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엄마는 ’네가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되었을 뿐이야‘ 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엄마가 제게 고백 성사를 하던 중에 제 의식의 창고에 잠겨 있던 그 순간과 그때 엄마가 제게 했던 말이 기억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고 무서움에 떨던 저를, 제 어머니는 무조건 용서해 주셨던 것처럼, 저 또한 제 엄마처럼 고백 성사를 통해 하느님께 돌아오는 영혼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느님께서 제게 말씀하신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저는 저에게 고백 성사를 보는 분들에게 보속을 주지 않습니다. 저는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해드리는 일은 죄를 지어 드리는 것이며, 우리가 하느님께 받는 것은 용서받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헌은 어떤 행업이나 선행보다도 죄를 지은 우리 자신을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고백 성사는 단지 죄를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느님 당신은 사랑이며 용서이십니다!‘

 

용서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저지른 잘못에 대해 갚아야 할 대가를 면제받는다는 뜻입니다. 부연하자면, 용서란 악행의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용서(=용서하시는 하느님과 용서받은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생긴 결렬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화와 갈등이 치유되며 빚이 탕감되고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태오 18,23~35 매정한 종의 비유를 한번 천천히 읽어 보시도록 권고합니다. 용서에 대한 언어적 배경은 다양합니다. ‘떠나보내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페이나이 apheinai와 ‘사슬을 끊고 놓아 주다’라는 뜻의 라틴어 압솔베레absolvere가 있으며, ‘빠져나가다’라는 뜻의 라츠레사티razresati도 있는데, 죄수가 구금 상태를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 게 아니라 죄를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하느님은 죄에 대해서만 ‘망각증 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죄를 통해 죄인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계속 죄를 붙잡고 계시지 않습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치워버렸습니다.>(시103. 12)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께 우리가 용서를 간절히 간청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늘 먼저 용서해 주셨는데, 그 까닭은 하느님은 용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의 가장 ‘하느님다운’ 모습은 바로 ‘용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를 단지 듣기 좋은 소리로만 이해한다면, 인간의 성향이 이와는 반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우리가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수많은 죄를 용서해 주시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난 뒤, 어느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여, 말해 보게나. 자네의 외투가 찢어졌다고 그것을 버리겠는가?” “아닙니다. 수선해서 다시 입어야 합죠.” 그제야 랍비는 “자네가 찢어진 외투를 아까워하는데, 하느님께서 어찌 당신의 모상인 자네를 아까워하지 않으시며 용서하지 않으시겠는가?”

 

이렇게 강론을 하면 오해가 생기더군요. 그러면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기에 자기 멋대로 살면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난 뒤, 죽을 때 쯤 고백하면 되지 않을까요? 쯧쯧 너무나 인간적이네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용서는, 분명 유다인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유다인의 관점은 모든 것을 인과응보 시선에 묶여 있었습니다. 선(善)을 행하면 선(善)의 결과가, 악(惡)을 행하면 악(惡)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생각에 집착했지만, 이에 반해 예수님은 이를 깨어 부수려고 하셨습니다. 사실 천당과 지옥은 미래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벌은 하느님이 아니라 죄인 스스로 만든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고뇌, 번민, 죄책감 그리고 강박감은 실제적인 결과이며, 이것이 바로 현세적 지옥이지요. 현실은 자신의 악행에 대한 댓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지요. ‘죄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또 다른 오해는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많은 부담을 갖고 살아가며, 결과적으로 잘못된 하느님 상이나 이미지로 향하게 됩니다.

 

사순절은 신앙인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흔히 사순절이 되면 연중행사처럼 교회 각 지체들은 앞 다투듯 40일 동안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자제하면서 부단한 극기와 보속을 실천합니다. 초콜렛이나 아이스크림, 담배나 술을, 고기나 음식을 금합니다. 그렇지만 사순 시간 지나면 언제 그랬나 싶게 잊고, 이내 옛 생활로 되돌아가지요. 사순절은 신앙 학교의 시험기이고, 부활은 방학 기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런 행위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거나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모든 행위 이전에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외적인 것보다 내면으로, 희생이나 극기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자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분명 옛 낡고 육적인 자아가 죽고 새롭고 영적인 자신으로 거듭 낫기 위해, 자신의 죄책감의 무덤에서 벗어나 용서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거침없이 부활의 기쁨을 보고 맛 들이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올바른 지향, 하느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의 여정 중에서 사순절은 단지 극기와 보속을 경쟁하듯이 실행하는 연중행사가 아니라 거듭거듭 하느님의 사랑으로 변화하기 위해 자신과 싸움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로 거듭나는 시기입니다. 예전 저의 양성 지도자는 사순절이면, ‘~을 하지 않거나’, ‘~을 먹지 않거나’, ‘~무엇을 행하도록’ 아주 많이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박도세 신부님은 제게 사순절을 살아가면서, 목마르거나 무엇을 먹고 싶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이신 주님을 보고 ‘감사합니다.’라고 먹고 마시라고 하더군요.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희생해야 할 때도 있지만, 주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지금 먹고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먹고 마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희생으로 우리가 희생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살기보다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금육과 단식도 하고, 단주도 금연도 합니다. 그 까닭이란 바로 자신의 만족과 건강 때문에 이를 꾸준히 실행합니다. 사순절에만 하는 ‘안 먹고 안 마시며, 안 피우고 안 보는’ 게 능사나 전부가 아니라 먹고 마셔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스스로 만든 약속이나 다짐을 이행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사랑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실천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요?

 

사순절이나 대림절의 단식과 금육, 절제 등 이것저것을 함으로써 혹은 이것저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신지 그리고 얼마나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실행함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닮고 그분의 영으로 변화하는 정화와 은총의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지속적입니다. 용서란 우리가 얻어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존재의 상태입니다. 외적 금육과 단식, 절제와 극기 수행실천에만 초점을 맞추게 될 때, 참된 내적 자아의 실제적 변화 대신 자신이 다짐하거나 결심한 것을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했는가를 스스로 만족하는 자기 성취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해야만 하는 의무적인 행위, 때론 타인에게 자신의 올곧음을 보이기 위한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금기’를 지키고 준수하는 행위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구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13,10) 사랑이 구원입니다.

 

사순절 동안 그리고 일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지난해와 달리 금년 사순절은 어떤 점에서 변화해야 하는가?’입니다.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바꿀 수 없기에, 금년 사순절엔 어떤 면을 주님 보시기에 좋게 변화하도록 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타인을 용서하려고 한다면, 먼저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잘못을 흘려보내고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태오 18:15절에서는 갈등 해소의 책임이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도 있기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먼저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찾아가서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란 갈등의 해답이 될 수 있으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감정은 이를 방해합니다. ‘저는 그를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하지만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에 원한과 증오를 품고 살아가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예전 저는 공동체 형제와 갈등으로 참으로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제 느낌이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사람이었지만,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꾹꾹 짓누르고 살았더니 몸이 먼저 아픔으로 다가오고 말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그 형제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도 모르게 ‘그때 이후 너무 힘듭니다.’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되돌아온 답변이 ‘그것은 아오스딩의 느낌이며 문제입니다.’ 혹 때려다 오히려 혹하나 더 붙인 꼴이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죠. 그는 자신의 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형제에게서 혹시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기대하며 살았던 제가 한심하고 부질없는 짓을 해서 나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쥐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손을 놓아 버림은 자신을 자학하지 않고 자신을 용서하며 사랑하는 행위의 시작입니다. 사실 용서란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서 반드시 빚을 받아내는 것은 아니지요. 용서의 시작은 의지를 통한 의식적 결심에서 비롯합니다. ‘사랑은 결심하는 것이다.’는 말처럼 용서 역시 의지로 결심하는 것이지 느낌의 차원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용서하는 것은 먼저 의지로 용서하는 것이며, 느낌까지 용서하는 것은 차후 일입니다. 인간의 몫은 의지로 용서하려는데 있으며,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용서해 주셨음같이 용서하려고 결심하다 보면 마음도 차차 의지를 따르는 법이고 느낌으로까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유행가 노랫말처럼 ‘세월이 약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아픈 상처도 잊어지고 아물어 가며 퇴색되어갑니다. 예전 미국 유학중 다른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몇 분의 목사님도 함께 했는데, 그때 어느 목사님이 용서는 과거를 묻지 말고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자기 아내는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hysterical이 아니라 'historical'이 된다고 표현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맞는 표현입니다. 용서는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하느님의 은혜이며, 신적인 은총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독특한 인간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용서의 본질적 효과 중 하나는, 용서받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용서하는 사람의 인간성이 향상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그분의 한없이 자비로우신 마음의 평화와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분의 삶의 태도와 방식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바로 이런 용서의 태도였습니다. 사실 용서하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자학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며, 인간의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하심이 우리의 용서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이며, 용서는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구원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갈등의 해소책임은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상처를 입힌 사람이 먼저 찾아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 23-24) 이는 곧 갈등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서 갈등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바로 그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95년 우이동 명상의 집 강의실 확장이 필요해서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겉만 보고 단순하게 생각해서 시작했지만, 워낙 벽이 튼튼해서 시간이 지연되었고, 그로 인해 경비가 많이 증액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겉과 달리 우리 내면에도 보이지 않는 튼튼한 벽이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우리의 정겨움 넘치는 만남을 가로막고 있는 내면의 장막을 찢어라!”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내면에도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마음의 단단한 벽과 장막이 있습니다. 그 담과 장막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참됨을 아는 것을 방해하고 타인과의 의미로운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대부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자신에 대한 기만, 가식, 위선의 가면 뒤에 살고 있습니다. 그 담과 장막은 우리 내면의 깊숙한 어딘가에서 깨어져야 하고 찢겨 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건드리자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던 것처럼(탈출17,6참조), 우리 내면의 돌과 같은 마음을 주님의 영께서 건드릴 때만이 비로소 물이 솟아나고 흘러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흐르는 살아있는 물을 통해 우리는 이해와 사랑과 헌신 속에서 본래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실 가정이나 수도 공동체 생활, 곧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면 상호간에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과 긴장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갈등들을 원만히 해결하지 않을 때 그 대가는 대단히 비쌉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소크라테스에게 유명한 악처가 있었답니다. 늘 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느라 가정 경제에 소홀한 남편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던 아내가 어느 날 광장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큰 대야에 많은 물을 가져와서 남편의 머리에 물을 퍼부었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소나기가 내린 다음에 천둥 번개가 치는 법이지!’라며 이를 무심하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갈등이 해소되지 않을 때는 단지 소나기나 천둥 번개 정도가 아니라 우리네 삶에 아주 심각한 장애를 만나게 됩니다.

 

인간관계는 정지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적인 관계인데, 갈등은 상호 간의 친밀감을 줄어들게 하고, 이는 당연히 대화를 회피하게 되며, 대화를 한다 해도 지극히 형식적이거나 사무적이 됨으로써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또한 갈등으로 불편한 관계는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그로 인해 몸도 마음도 편치 않음으로 차츰 신체 변화가 일어나고 급기야 몸이 말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긴장은 관계와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원인입니다. 물론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매사 짜증이 심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반응과 타인에게 전이와 투사를 하게 됩니다. 흔한 표현처럼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듯이 약자에게 자녀들에게.... 그리고 이런 상태는 지나치게 상대방에게 과민한 반응(=과민증)을 보이기 쉽습니다. 이 지경이 되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이미 죽은 상태와 같습니다. 마침내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회의와 신앙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런 갈등의 해소는 마치 신발 뒤축에 못이 박혔을 경우처럼, 1) 그 못을 의식하지 않고 무시하고, 다만 살아가면서 저절로 해소되기를 바라는 것이겠죠. 하지만 원의대로 되지 않고 더 곪을 수 있답니다. 시간이 약이겠지만 때론 그렇지만 않은 경우도 있답니다. 2) 못이 나온 부분에 다른 것을 덧대는 방법입니다. 이 또한 임시방편이지 진정한 해결책은 되지 않습니다. 어느 때가 되면 다시 도지고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3) 망치로 못을 빼내는 방법입니다. 이게 가장 현명하고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사실 억압이나 회피는 잠시 잊겠지만 언젠가 다른 문제로 자극받으면 더 악화되고 심한 문제로 번져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서로의 문제를 덮어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의 문제는 그냥 두면 계속 곪아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외과 수술처럼 환부를 아프지만 도려내는 것처럼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 근본적인 해결책이 바로 용서입니다.

 

참된 용서에는 수의 제한이 없습니다. ‘이번만은 용서하겠습니다. 그러나 재차 이런 일이 있을 때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단서와 조건을 주는 용서는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이런 용서는 잠정적, 조건적 용서이며 이는 법률적인 관점에서 보면 집행유예와 같습니다. 그래서 집행 유예기간 동안 다시 잘못하면 과중처벌을 받는 것처럼 우리의 용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성급하고 직선적인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호기롭게 <그러면 일곱 번이면 되겠지요?>(마태18,21참조)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18,22)고 단정적으로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결국 용서란 제한이 없고 한계가 없다는 유권해석과 같습니다. 한생 동안 살아가면서 같은 사람에게 490번 이상 용서한다는 것은 결국, ‘용서는 무제한이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참으로 하느님다움이며, 이 용서를 살아가도록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490번 이상,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용서해 주십니다.

 

용서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심각하게 묻고 답해야 합니다. -나는 갈등을 해소하려고 시도하고 있나 아니면 전혀 하고 있지 않나. -나는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는가? 그럼에도 나는 높은 담과 탑을 쌓고 갈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나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성서에 의하면, 내가 먼저 상대방을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스스로 끊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란 자기 사랑과 자기 용서에서 출발합니다. 이를 토대로 용서의 단계는 이렇습니다.

 

1) 상대방의 입장에 서라! 인디언은 언제나 타인을 심판하고 단죄하기 이전에,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3일을 산다고 합니다. 이는 곧 易地思之의 마음으로 바라보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미워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은 우리네 삶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나와 무관한 사람과는 삶을 살면서 엮일 일이 별로, 거의 없습니다. 용서容恕란 한자어 容은, ‘얼굴 용’자로 그 얼굴은 바로 용서해야 할 대상의 얼굴이며, 恕는 ‘용서할 서’자로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이 합해진 글자로 결국, 용서는 내가 용서해야 할 대상과 같은 마음이 될 때, 역지사지가 될 때 용서할 수 있다는 지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용서해야 할 대상을 작성해 보시면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가족이나 함께 공동체에서 활동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는, 즉 주는 게 없이 미운 사람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이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기 때문인데 이를 보지 못하고 화살을 그에게 쏟고 있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마치 삿대질할 때, 손가락 하나는 그 사람을 향해 그러나 남은 손가락은 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2) 위에서 언급했듯이 용서는 먼저 의지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살려는 의지의 실행과도 같습니다. 용서는 느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용서에 있어서 하느님의 몫과 인간의 몫이 있는데, 인간은 의지로 할 때, 하느님은 느낌까지 용서하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사실 콩나물 살 때와 엄청 비싼 것을 살 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엄청 큰 죄는 아주 대범하게, 쉽게 용서하지만, 아주 하찮은 잘못이 쌓이고 쌓인 작은 죄를 용서할 때 콩나물 몇 푼 한다고 덤을 더 요구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손놀림처럼.... 작은 것에 목숨 걸고 집착하며 살지 맙시다.

 

3) 용서해야 할 사람에게 더 잘해주라! 무척 어렵지만 잘해주다 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편해질 겁니다. 옛말에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처럼 작은 실천이 자신을 압박하는 느낌에서 자유롭게 해줄 겁니다. 자신을 짓눌렀던 먹구름이 차츰 사라지고 가렸던 태양을 보게 될 겁니다. 이처럼 용서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을 품는 데 있습니다.

 

4) 어렵겠지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 주라! 그러다 보면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 많은 은총으로 넘칠 겁니다. 돈 보스코 성인이 하루는 운동장에서 놀다가 힘이 있는 친구가 다른 약한 친구를 때리고 도망가는 것을 목격하고서는 매 맞은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내가 복수해줄까?”라고 하자 그 아이가 기분이 수그러드는 것을 보신 다음 함께 기도했답니다. 먼저 상처받은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때리고 간 이이를 위해서, 참으로 용서는 역설적으로 가장 좋은 복수입니다.

 

5) 자신의 갈등과 상처를 함께 나누라! 함께 나누는 가장 좋은 시간과 장소는 바로 온 마음으로 누군가와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런 공간이 바로 고백소이며 고백 성사의 시간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고백성사는 철저한 비밀이며 발설은 곧 대죄입니다. 이미 위에서 저의 첫 고백자가 제 친정 어머니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함께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며 은총인지 아십니까?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리자면, 사제인 저는 하느님처럼 건망증 환자입니다. 제가 들었던 죄를 기억하고 산다면 저는 지금껏 힘들어서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하느님은 사제에게 ‘들은 것을, 이내 잊을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고 느낍니다. 다른 사제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습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자신의 느낌을 드러내서 함께 나누다 보면 자유로워지고 더 큰 은총을 덤으로 받을 겁니다. 이제 용서하며 삽시다.

 

저에게 용서란 무엇인가를 가장 뚜렷하게 가르쳐 주신 분은 제 어머니입니다. 제 남동생이 아들을 낳았는데, 휴가를 가서 어머니와 함께 제 남동생의 집에 갔었습니다. 안방에서 어머니는 저에게 ‘신부 여기 앉아봐!’라고 당신 옆에 저를 앉게 하시고는 조카를 향해 ‘까꿍 까꿍’하면서 손 벽을 치신 것입니다. 그러자 조카는 할머니를 알아보고는 일어섰다 넘어지고, 일어섰다 넘어지면서 한 걸음씩 할머니를 향해 나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용서는 까꿍이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주가 넘어졌음에도 계속해서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제 어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라고 반복하시면서 기쁘셨고 흐뭇하셨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제 조카처럼 쓰러졌다 다시 일어서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고, 이를 보신 하느님 또한 ‘아이고 내 새끼 정말 장한 것’하며 기뻐하시고 대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거듭거듭 다시 일어나서 나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너를 용서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았어 다시는 천근의 돌덩이에 내 가슴 짓눌 리고 기억의 끌로 쓰라린 상처 밀고 또 밀며 분노하지 않겠어. 너를 용서하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임을 알았거든 용서하는 것은 너의 그림자와 나의 그림자를 묶었던 캄캄한 끈을 놓아도 된다고 이제 그만 아파해도 된다고 가슴이 아픔을 풀어주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 남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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