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19.08.11 07:36

연중 제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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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엘리엇은 <텅 빈 사람들>에서 <인생은 매우 길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표현인데, 그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으로 그 긴 인생을 채우며 사는 걸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찾다가 저는 조병화시인의 <지루함>에서 찾았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지루할거다. 그 기다림이 너무나 먼 인생은 또한 지루할거다. 그 기다림이 너무나 먼 인생은 또한 지루할거다. 그 기다림이 오지 않는 인생은 더욱 더 지루할거다. 지루함을 이겨내는 인생은 더욱 더 지루할거다. 지루함을 이겨내는 인생을 살려면 항상 생생히 살아 있어야 한다. 새로운 그 무엇을 스스로 찾고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산다는 걸 잠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모습을 항상 보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지난 주 복음이 재화(富)와 재화의 참된 선용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인생과 그 시간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짧은 몇가지 비유를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들의 공통점은 매우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어떤 기다림과 오실 주인이 '지금 여기'에 부재(不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다리고 있는 종이 주인에 대한 인격적 관계와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그 기다림의 태도나 행동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종과 언제일지 모르지만 오실 주인과의 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태도를 예수님께서 복음적 시선에서 새롭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 작은 작은 양떼야, 두려워하지 마라.>(Lk12,32)고 위로하십니다.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심판을 두려워하며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그 나라를 기꺼이 주기로 하셨셨다.>고 약속하셨으니 이 땅을 살면서 비록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기뻐하며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를 통하여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11,1)라고 권고하면서,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살았던 신앙인의 성조인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살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가득 찬 약속에 대한 믿음이 바로 우리 기다림의 토대이며 반석입니다.

 

지금껏 수도자로 살면서 느끼는 점은 순종과 사랑은 정비례한다고 생각합닏아. 장상이 평소에 수하자를 진심으로 인정해주고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고 알고 있다면, 장상이 수하자에게 비록 힘들고 어려운 일을 부탁하거나 요구할 때, 마음에서 기꺼이 우러나오는 순종이 가능해집니다. 이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학하고 사랑한다면 아니, 아버지께서 나를 깊이 사랑하고 아끼시며 나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려 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아버지가 보시거나 보아주지 않거나 상관없이 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할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앞에 살려고 했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 앞에 살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읏으신 순간부터 십자가상에 죽는 순간까지 시종여일 아버지 사랑을 신뢰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자녀다운 효성을 순종으로 살면서 그 참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울러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신뢰에 바탕을 둔 기다리는 종의 태도는,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주고자 하시는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응답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인이 왔을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이 새로운 의미로 들릴 것입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은 이 종의 행복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입니다. 주인이 왔을 때에 잠들어 있지 않아 주인에게 잘 보였으니 다행이라는 말이 아니라, 나를 아끼시는 주인이신 주님을 오래 기다렸는데 깨어 있으면서 그 주인을 만났으니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신을 기다린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그들 곁에서 시중을 들리라는 말씀은, 정상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를 벗어나지만, 어느 순간 우리를 찾아오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말해 줍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셨는지 묻습니다.(12,41참조) 예수님의 대답은 한마다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12,48)고 명백히 밝히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주인이 없을 때에 주인의 뜻에 따라 집안의 모든 일을 관리할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의 부재 기간은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가꾸어 나갈 책임을 지니는 기간입니다. 제한적일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안다면 우리한테는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메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12,34)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같은 기다림에 앞서 하신 말씀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12,33)고 그 구체적인 행동을 당부하셨습니다. 참된 기다림이란 무턱대고 넋놓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 주어진 소중한 인생이란 시간을 활용하여 자신이 받은 탈란트로 사랑의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이며, 그럴 때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라 하신 것은, 진정 사랑의 실천으로 당신을 기다리라 하시는 명령인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살아야 할 깨어 기다림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삶을 지뤃루하지 않게 하고 의미와 보람으로 꽉 찬 삶이 아닐까 싶네요. 오늘 지혜서에서 하느님의 법에 동의한 옛 사람들처럼 그들의 거룩한 자녀들이 하느님의 뜻을 살려할 때, <거룩한 이들은 모든 것을 다같이, 성공도 위험도 함께 나누었다.>(지18,9참조)고 언급한 것은 그들 또한 듣기만 하지 않고 들은 것을 실천하였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카 예언자는,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6,8)고 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종의 올바른 태도인지 몰라서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는 바를 지금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 깨어 사는 사람,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방주연의 노래 <기다리게 해놓고>라는 노래 가사와는 분명 다른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지리라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해놓고 오지 않으실 분이 아니심을 우리는 믿어야 하며 그 기다림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에 다시 만날 꿈을 꾸면서 주어진 시간을 꽉 채운 삶을 살아가도록 오늘 새롭게 다짐해 봅니다. 긴 인생 동안 기다리면선 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며,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 가를 생각하면서, 나눔의 삶을 통해 하늘에 보물을 쌓아가는 우리네 인생길이 됩시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시33,12)

 

**오늘은 성 클라라 축일이지만 주일인 관계로 축일을 지내지 못합니다.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클라라(Clara: 빛을 뜻함)는 성녀의 어머니가 기도 중에 <온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음성을 듣고 그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향을 받은 성녀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부모 몰래 집을 나와 클라라 수도회를 창설하였습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철저하게 가난과 겸손의 삶을 살았으며, 1255년 알렉산데르 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오늘 클라라 축일을 맞는 모든 분들과 성 클라라회 수녀님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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