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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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대부분은 바티칸 공의회 이후(1965년)에 세례성사를 받으신 분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 또한 바티칸 공의회 이후인 1968년에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많은 분은 무척 당혹스러워하더군요.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교회 가르침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쳐 왔고, 그런 기조 위에서 전교 활동(=복음화란 관점보다 교세 확장)에 주력해 왔었죠. 즉, ‘교회 안에 믿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고 교회 안에 구원이 있다. 그래서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우리 교회로 데려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기저엔 ‘우월주의적이며 배타주의적인인 태도’가 내재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배타주의적 태도의 가장 핵심이 되는 근거는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회의 확신 때문입니다. 이 주장이 오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처럼 교회도 유럽 중심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다른 지역의 종교와 소통하고 대화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티칸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새로운 시선에서 다른 종교와 대화하고 상호 이해를 촉진하고자 하는 교회의 다짐이었습니다. 지난 3월 5일부터 8일까지 교황님의 이라크 방문도 이런 기조 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오신 대화와 평화의 몸짓이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바티칸 공의회 이전엔 배타주의Exclusive적인 관점에서, 공의회 이후 포괄주의Inclusive적인 관점으로 전향하였습니다. 칼 라너는 이런 열림의 관점에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칭했으며, 이는 곧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원의 본질이 무엇이며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그 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초기 교회가 그리고 현대 교회가 직면한 현안은 바로, 위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Jn15,5) 이 말씀 중에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표현하자면 <나와 함께라면 너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즉 구원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예수님과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이처럼 구원은 교리가 아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사랑으로 행할 때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믿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누구를 믿느냐이며, 우리가 얼마나 옳게 믿느냐가 아니라 믿는 대로 잘 사느냐가 관건입니다. 모세의 율법이나 교회의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우리의 생명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께 대한 믿음과 그분이 전하는 진리를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구원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냐?>는 질문의 답은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율법의 충실한 신봉자였으며,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살았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동조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여정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 과정에서, 곧 눈멂에서 눈뜸으로, 사울에서 바오로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써 새롭게 거듭났습니다. 그의 회심은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차원에서 회심이라기보다 실존적인 결단의 결과입니다. 곧 사느냐 죽느냐는 실존적 질문에 대한 실존적인 결단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삶도 그 의미도 없다는 절박한 자각과 그에 따른 투신이었습니다. 제1 독서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남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그 부활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체험을 통해, 아직도 자신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두려워 피하는 공동체 형제들의 태도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과 관계에 기반하여 부활의 증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사9,26.27) 훗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필3,8.9;갈2,20) 이토록 사도 바오로는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고 했기에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산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제2 독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Jn3,18)고 권고합니다. 사도 요한의 고백 또한 단지 언행일치의 윤리 도덕 차원만을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진리로 사랑하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과의 사랑의 친밀한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믿는 이들과 끈끈하고 친밀한 관계>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중심적인 어휘가 바로 8번이나 반복된 <머물다.>라는 표현입니다. ‘머물다’는 표현은 우선 일차적으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다.>(15,4)는 표현처럼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이 생명의 수액을 공급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차적으로는 붙어 있지만 않고 생명의 수액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되어야 만이 참으로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 나는 정말 열매 맺고 있는 가지인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 가지는 사실 자신은 물론 다른 가지와 나무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러기에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한 가지는 잘려서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리고 불에 태워질 겁니다.>(15,2,6) 가지는 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15,5) 주님 안에 끈질기게 머물고 주님께 붙어 있을 때만이 풍부한 영양분을 공급받고, 보기 좋고 맛도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양 풍부한 열매를 맺으려면 이처럼 주님 안에 굳건히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는 관계만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열매는 뿌리와 줄기를 통해 사랑의 수액을 받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실행할 때 맺는 것처럼,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 또한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되고, 열매를 많이 맺으며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포도 농사법은 예전과 달리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전엔 지금과 같은 Y자나 T자 형태의 지지대를 사용하지 않았고, 단지 작은 돌이나 다른 것으로 ‘들어 올려’ 주었다고 합니다. 가지를 들어 올린 까닭은 우기雨期에는 줄기가 습기에 오래도록 접촉하면 썩어버릴 수 있고, 건기乾期에는 가지가 자체적으로 뿌리를 내리려고 하기에 원래 뿌리에서부터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지는 줄기와 뿌리와 굳건히 결합되어 있을 때만이 제대로 영양을 공급받고 적절한 때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호 의존관계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무가 가지를, 가지가 나무를 서로 믿고 의지할 때 포도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상호 협조적인 관계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15,5.8) 예수님 안에 친밀하게 머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많은 열매를 맺을 때 예수님으로 인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며, 영광스럽게 되신 아버지께서는 영광스럽게 해주실 것입니다. 지난 부활 3주간 금요일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6,56)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물다.’는 표현은 단순한 공간에 입주나 거주가 아니라, ‘한 몸이 되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 안에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이 머물면서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머물다.>는 표현은 <相互內住 관계>를 표현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의 관계입니까? 
                                                          

저는 세례받은 1968년부터 셀 수도 없이 자주 성가 35번을 불러왔지만, 이쯤에야 이 노랫말이 제 마음을 뜨겁게 불타오르게 합니다. 그러기에 이젠 목석처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작은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러하리라>(가35)를 부르지 않습니다. 성가가 기도라는 사실을 새삼 강하게 느끼게 하는 노랫말입니다. 


  1. 사순 제3주간 수요일 : 마태오 5, 17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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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루카 4, 24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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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사순 제2주간 토요일 : 루카 15, 1 – 3. 11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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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마태오 21, 33 – 43. 45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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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 22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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