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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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피정 지도하면서 느꼈던 것은,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십인십색이라는 표현처럼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지만 어쩌면 그렇게도 다른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참으로 놀랄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이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예수님과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과는 상당히 다른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복음을 복음대로 믿고 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믿고 싶고, 생각하고 있는 <만들어진 예수상>에, 이는 자신의 선지식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과 전혀 다른 분을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고 그러면서도 가장 우선적인 일은 자신이 만든 예수님 상像을, 거짓된 神像을 버리고 깨트리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문열 작가가 쓴 소설 <사람의 아들>이 자꾸 떠오름은 어쩌면 위에 언급한 제 생각 때문일지 모릅니다. <사람의 아들>에서, 주인공 민요섭은 기성 기독교의 현실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 이 사회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자기 나름의 이상적인 종교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거짓 <사람의 아들>이라 보고, 외경에 나올 듯한 인물인 아하스 페르츠를 참된 <사람의 아들>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의 열렬한 추종자인 조동팔이 정의(正義)의 실현을 위해 살인 등 극단적인 방법까지도 정당화하는 걸 보면서, 회의를 느껴 다시 옛 신앙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웃지 않고 성내지 않는 우리의 신, 기뻐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며 꾸짖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는 우리의 신 그에게 이제 지쳤다는 거요. (중략) 불합리하더라도 구원과 용서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스승 민요섭에게 실망하여 조동팔은 자기 스승을 살해하고 맙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9)라고 묻자,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복음은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의 그리스도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들려주면서, <예수님은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8,31)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보고 들었던 스승의 행동과 말씀 속에서 권위와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상상한 베드로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의 수난 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스승의 수난 예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8,32참조) 어쩌면 베드로 사도가 속마음으로 고대하는 메시아는 아하스 페르츠가 생각하고 추구했던 신상과 같습니다. 광야에서 악마의 집요한 유혹에 시달리던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Mt4,10)고 호통치셨는데, 오늘은 베드로 사도에게 더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8,33)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욕망의 한계에 갇혀 있는 베드로를 향해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인간의 계획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무엇이 베드로 사도로 하여금 그토록 예수님의 말씀을 강하게 부정하고 거부하도록 하였을까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께 보인 반응을 떠올려 볼 때, 베드로 사도는 봉사 받으러 오지 않고 봉사하러 오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낮추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드러난 하느님의 나약함을, 비천함을 보지 않으려 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우리의 본연의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철학적인 신은 인간으로부터 흠숭과 숭배를 받을 뿐, 인간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성서가 계시하는 하느님은 이와는 달리 사랑할 줄 아는 하느님이시며,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인간을 위하여 내어주시기까지 하는 인격적인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인성 안에서 하느님의 신성을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것은 곧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하느님,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이 겪는 고통, 특별히 조롱과 모욕과 무시당하고 버림받기까지 하는 인간의 가장 비참하고 낮은 처지까지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8,31)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이 아니라 초라하고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임을 알려줍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구원의 여정이야말로 당신이 가야 할 길임을 명백히 표명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8,34)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라 뜻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제대로 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오스딩 성인은 <여러분이 세상 근심에 얽매어 하느님의 목적을 실천하는데 게을리하는 것을 보면 여러분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라면 당당히 지고 가는 용기와 성실한 끈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 야고보는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2,17)라고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름>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8,35) 걸고 삶으로 증거하는 믿음의 사람은 자기 목숨을 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여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Jn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아마도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당신께서 보여주신 행동을 본보기 삼아 실천하라고 격려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을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금 묻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믿고 고백한다면, 이제부터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최우선적으로, 으뜸으로 고려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화답송 후렴의 노래처럼 <주님 앞에서 걸어가게 될 것이며,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걷게 될 것입니다.> 
    
마르코는 복음을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고 믿도록 이끌어 주는 믿음과 구원의 안내서와 같습니다. 이 안내서를 따르다 보면 마침내 우리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 길의 끝에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처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라고 마침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이시며 내 인생의 참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자신의 진정한 회심과 그 회심에 이어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단지 듣기 좋은 말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이를 넘어서 믿음의 행동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믿음은 결코 자신의 이기주의 바람막이가 아니라 십자가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 생명바치리 믿음으로>(성가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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