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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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 예수님의 가르침이 문뜩 무겁게, 힘겹게 다가오는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그때가 바로 ‘쉐마’ 곧 몸과 마음으로 들어야 할 주님의 말씀이 은총으로 다가오고, 영적 성장으로 초대받는 때인지 모릅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부담스럽게 하는 말씀 가운데 한 가지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6,27)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생생하게 들린 까닭은 바로 지금껏 나와 무관한 가르침이라 생각하였는데 어느 순간 내 삶의 숙제로,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파격적인 요구를 하신 의도를 파악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전후 문맥을 알아들을 수도 없을뿐더러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예수님의 메시지 방점은 바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를 더 선명하게 명료하게 알아듣도록 오늘 독서 사무엘을 통해 자비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윗은 무고한 자신을 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온 원수와 같은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자비를 베풀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1사26,9.23) 또한 사도 바오로는 1코린토서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생명을 주는) 영을 주시어 당신의 모습을 지니게 하신 것’(15,45.49참조) 또한 하느님의 자비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독서와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자비’에 있으며, 이를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원수를 사랑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원수가 누구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원수는 자신에게 물질적인 손해, 육체적인 고통, 심리적인 상처를 입힌 흉악한 어떤 존재라고 피상적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좀 더 세밀히 상황을 직시하고 직면하다 보면 일반적으로 자신의 가족이나 이웃, 동료일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결국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나의 원수는 나와 밀접하게 소통하고 친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내 십자가이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부채(=사랑의 빚)로 그들은 우리가 갚아야 하는 사랑의 빚쟁이입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지지 마십시오.>(로13,8) 그러기에 우리 엄마처럼 <아이고 원수가 따로 없어!>라고 할 때, 내 인생의 원수는 바로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이웃입니다. 그러기에 원수는 배우자이고 자식이며, 형제자매이고 친구이자 동료인 경우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 원수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그 원수를 사랑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사랑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때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잖아요. 그가 혹 그녀가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도록 기도하고 기다려 주며,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이해하고 수용하고 사랑하며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숙제 하나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I.M.F 시절 보증 문제로 갈등을 빚은 형님들이 지금까지 원수처럼 살고 있고, 그 새 중간에 놓여있는 저 또한 원수처럼 여기고선 자신을 이해하지 않았고, 도움도 주지 않았다고 단정하고서는 저와 관계를 끊고 사는 형제가 있습니다. 형님들의 화해를 위해 기도도 하고 대화의 자리도 마련해 보려 했지만, 아직도 제 부모님이 제게 준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웬수가 따로 없다니까요. 형제가 원수입니다. 그놈의 돈 때문에!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갈릴리 언덕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23,34)라고 기도하실 때,  예수님 주변에 서 있던 청중은 분명히 각자의 원수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각 사람이 자신의 원수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들은 예전에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면서 자신들의 심장을 요동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발설하셨을 때, 예수님은 군중들이 예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가르침을, 단서를 덧붙이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너희는 지극히 높은신 분의 자녀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아버지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바로 여기, 바로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단지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행위가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메시지는 바로 하느님 자녀인 우리가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행위가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고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은 단지 주일을 잘 지키고, 교무금 내지 주일 헌금을 잘 내는 것 그리고 계명을 잘 준수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가길 바라시며, 자녀다운 실천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도하는 행위’가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자녀다움을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는 행위는 단지 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이 아닌 마태오를 인용하자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그 해답은 다음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5.48) 해답은 바로 <아버지 완전하신 것처럼, 아버지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온전히 자비를 베풀 때 우리 사랑의 부채를 다 갚을 수 있으며, 그 부채를 다 갚을 때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이를 통해 참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사랑의 완전함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사랑에서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그것이 예수님의 바람이셨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예수님은 도저히 실현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완전함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바,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 분이시다>고 하신 말씀에 이미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만 들으려는 자기 안에 갇힘에서 벗어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행간에 내재되어 있는 뜻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5,38)는 말씀처럼 어제의 낡은 인습과 생각을 내려놓고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시선에서 곧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신과 형제와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6,31)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용서하며 사랑하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실 것>(103,10)입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34)는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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