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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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안에 내가 있고 내 마음 안에 우주가 있다. 그래서 내 마음에 항상 해와 달과 별과 
형형색색 구름과 굽이굽이 절경을 이룬 산과 들과 사시사철 피어나는 들꽃과 탐스럽게 익은 열매 한가롭게 뛰어노는 들짐승과 온갖 새들이 날고 폭포가 있는 안개 덮인 깊은 계곡에서 
콸콸콸 흐르는 물은 넓고 푸른 바다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의 곳간은 항상 풍요롭고 아름답다.> (내 마음의 곳간, 유철상) 

하늘 안에 내가 있고 우리 마음 안에 우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곳간은 넓습니다. 그 넓은 마음에서 우리는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향한 아름다운 말이 나오고 선한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라는 말씀이 제 마음을 흔듭니다. 오래전부터 늘 들었던 말씀이었는데 그땐 듣고서 아무런 느낌이나 생각이 없었다가 이제야 무겁게 들립니다. 그래서 새삼스레 ‘말이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오늘 독서 집회서 또한 말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집회 27,6~7) 이처럼 독서나 복음에서 언급한 마음의 곳간과 말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말이란 음성학적인 면에서 부호이며 소리입니다. 집회서의 표현을 하이데거의 관점에 근거해서 보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인간은 언어 속에 거주한다.>라는 그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듯이, 존재가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언어 또한 존재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우리는 평소 듣긴 하지만 제대로 듣지 않습니다. 존재의 언어에 대해서 깊이 경청한다는 것은 말이나 말하는 그 존재에 대해 판에 박힌 듯 익숙하게 들어서는 아니 됩니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낯설게 곧 새롭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들어야 그 말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존재와 그 존재의 말을 낯설게, 새롭게 듣는 순간 사유는 시작되고, 그 사유 과정에서 파생된 생각은 언어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이렇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에, 새 언어가 자신의 사유체계에 들어오는 일은 완전히 다른 존재를 집에 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기존 관념에 균열을 내며 들어옵니다. 고정불변이라 믿으며 고착되거나 화석화되어 버린 생각에 이런 과정은 커다란 구멍을 내는 것이며 벽을 뚫는 것과 같습니다. 썩은 냄새가 나는 웅덩이에 새롭게 깨끗한 물이 들고나오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처럼 다른 존재를 자신의 집, 마음의 곳간에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로써 새로운 존재 변화의 가능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도대체 내 마음의 곳간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집회서의 울림에 응답하듯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고(6,45) 가르치십니다. 이는 곧 말이란 그 사람이 무엇을 듣고 보고 있으며 그 들음과 봄을 통해서 그의 사유가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의 입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마음속 생각이 무언의 언어인 몸짓이나 표정으로, 유언의 언어인 말로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과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꿔야 하고,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마음을 바꿔야 하는 이치입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이며, 그 사람의 시그니처와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에 대한 두 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첫 번째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비유입니다. 눈먼 이는 바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영적으로 눈먼 이는 자신 안의 어둠의 들보들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서도 언제나 이웃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하고 단죄하고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처럼 잘 드러나지 않은 허물과 약함을 고쳐주겠다고 생색을 내면서 형제의 티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며 떠듭니다. 이것이 곧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는 예수님 가르침의 본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6,42)고 위선적인 행위를 일삼는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질타하셨습니다.(마태 23장 참조) 두 번째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6,44)고 말씀하신 배경에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6,43)는 것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시고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는 결국 선한 곳간을 지닌 사람이고, 바쁜 나무는 악한 곳간을 지닌 사람으로 그들의 외적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열매처럼 인간의 행동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의 곳간에서 흘러나와 드러난 열매와 같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7,16) 위선자를 가려내는 방법은 바로 그들이 맺은 열매를, 행동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권고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2,5)라고 강조한 까닭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 환호성에서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필2,15참조)고 권고하신 것은 어둔 세상 안에 살면서도 별처럼 아름다운 존재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세상을 본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꿋꿋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오로는 당신의 편지를 읽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15,58)고 재촉합니다. 

집회서의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27,7)는 권고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참뜻을 깨닫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느 순간에 자신이 한 말을 듣게 되고,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원의를 느끼고, 반복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변화된 경험이 있습니다. ‘빈말도 자주하다 보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즉,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사랑합니다.>고 계속 상대방에게 말하고 작은 몸짓으로 표현하다 보면 정말 우리 마음속의 곳간은 점점 더 넓어지고, 넓어지는 만큼 선한 말과 선한 행동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깊은 의도 역시 동일하다고 봅니다. 즉 비록 그 사람이 예전에는 선인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비록 하찮은 행동이며 특별한 행동은 아닐지라도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들은 말씀을 실제로 실천하다 보면 이러한 행위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이>(루6, 48)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인격으로 변화될 수 있고 되어갈 것이라는 초대라고 봅니다. 당신을 만나기 이전, 곧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해 왔던 과거와 달리, 지금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면서, 악한 곳간을 온전히 비우고 비워진 그 곳간에 생명의 말씀으로 가득 채운 마음에서 솟아 나온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동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마음의 곳간에서 선한 말과 선한 행동으로 변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닮으려 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시92, 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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