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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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편 낭독할까 합니다. 제목은 제 고향 순천에 있는 선암사에 얽힌 정호승님의 시 ‘선암사’입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눈물 많은 저 역시도 정호승 시인처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서는 아니지만, 누이와 엄마 묘에 앉아 통곡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참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엄마 묘에 가면 눈물이 납니다. 흔히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고 울면서 인생의 의미를 배워간다고 합니다. 전 누나 잃고서, 또 엄마 하늘로 보내드리고 나서 자주 그리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누나를 잃고 무덤가에서 주님을 만났고, 엄마 잃고서는 방황 끝에 저 자신을 만났습니다. 눈물 쏟아내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를 통해, 하느님은 우리네 삶의 고난을 지나치시지 않고 지켜보시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3,7)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주실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질곡에서 이끌어내시기를 원하신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더욱 그분께서 항상 우리를 눈여겨보시며 통곡소리를 듣고 계신다니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위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삶의 고통과 환난 속에서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며, 주무시고 계시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시고 이스라엘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인들의 종살이에서 구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때가 차시어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귀를  통하여 하느님은 직접 눈과 귀로 보고 들으시며 우리의 고통과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고 이끌어 내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의문은 마음 밑바닥에 남아있고 가끔은 치솟아 올라옵니다. 왜! 주님을 믿는 이들은 아직도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왜! 정직하고 올바르게 사는 이들은 더 많은 아픔을 겪어야 합니까? 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야 합니까? 왜!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악인들을 남겨두고 착한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두 가지 사건 곧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18명의 목숨을 앗아간 안타까운 사건을 인용하시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13,3.5)고 하신 말씀이 진하게 가슴에 남습니다. 이 말씀은 회개의 긴박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마냥 시간에 휩쓸려 떠내려가듯이, 오늘이 어제와 같은 삶의 사고의식과 행동양식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일어난 일들은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런 일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그러니 이 경고는 당신 말씀을 듣고 당신의 은총으로 언제나 깨어 살아갈 것을 촉구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만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아이들과 여성들의 죽음은 개인적 책벌이 아니라 내재된 악의 속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이들과 여성들의 죽음은 인간의 악마적 죄악의 희생자들입니다. 전쟁은 물론 자연적인 재앙 또한 개인적인 징벌이 아니라 이를 통해 인간의 탐욕에 대한 하나의 경고입니다. 세상적인 것만을 집착하고 추구하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 대한 경고입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1코10,5.10.11)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악이 횡행橫行(=나쁜 일이 이곳저곳에서 마구 벌어지거나 나타남)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사순 제1주일의 주제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하고, 사순 제2주일의 핵심인 쓰러지고 넘어지며 엎어져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하느님께 되돌아가 새롭게 거듭나는 변화의 삶 곧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기름 병에 물을 붓고 아무리 잘 흔들어 봐도 물과 기름은 잘 섞이지 않습니다. 물과 기름이 하나가 될 수 없듯이 죄 중에 있으면서 하느님과 일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조건이다.’는 말처럼, 인간은 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고, 죄와 하느님은 공존할 수 없다면, 죄인인 우리가 구원되는 길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회개 없이 구원은 없다.’는 말을 우리 마음에 새기면서 이 말을 실천해야 합니다.  

회개의 본래 뜻은, 어떤 길을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알고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경부선을 타고 부산으로 가려고 했는데 호남선을 타고 목포까지 가버렸다면, 목포에 머물지 않고 호남선을 타고 대전까지 되돌아와서 어렵지만 다시 환승해서 경부선 부산행을 타야합니다. 이렇듯이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것이며, 사고와 행동 양식의 변화, 전환하는 것입니다. 삶의 낡은 시선이나 편협한 관점에 대한 일종의 발상의 전환, 곧 마음 바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를 주저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다시 경고하십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13,7) 이렇게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잘라버리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포도 재배인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13,8~9) 멸망은 이처럼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뒤로 미루어진 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할 것을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시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고, 다음으로 미룬다면 우리도 어떤 참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회개하지 않고 고통을 당한 후에 ‘왜 나에게’라고 묻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당장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회개하도록 도전하고 계십니다. 현대를 일컬어 ‘죄는 범람하는데도 죄의식은 없는 시대’라고 합니다. 여기에 우리 시대의 문제가 있습니다.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장관으로 지명 받은 이들이 진솔하게 자신의 잘못이나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치기보다는 관행이니 실수였다고 변명과 억지를 부르는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살면서 머리로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조금도 죄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남 말하지 말고 우리 역시 참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변명과 탓을 돌리지 않고 했던 일 그대로 덧칠하지 말고 이실직고以實直告해야 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겉과 속을 다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죄 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기 위해서 마음을 찢는 통회와 고백을 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죄를 짓고도 마음에 죄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하느님 앞에 참된 회개와 통회를 한 게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주님 앞에서 통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복음환호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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