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조회 수 18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인지심리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똑같은 것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면을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면을 봅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긍정적인 것을 담고 있는 사람은 같은 일을 두고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게 되고, 자신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것을 담고 사는 사람은 부정적인 면을 더 눈여겨보게 됩니다.

예전 제가 병원에서 원목 신부로 생활할 때 가깝게 지내던 신자 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그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신부님, 세상이 달라 보여요’ 그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다른데?’, ‘전에는 세상이 참 재미없게 보였는데 지금은 사는 재미가 나요. 아침에 눈을 뜨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사랑에 빠진 그의 눈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음에 사랑을 담고 사는 사람들의 눈은 세상도 다르게 보이는 법이지요. 누군가를 사랑하다 보면 모든 게 아름답게 보이나 봅니다.

 

사랑은 눈여겨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눈여겨봅니다. ‘눈여겨본다.’는 것은 마음을 기울여 정성을 다해 바라보는 시선 곧 마음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들과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의 곁을 지나가는 예수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그분이 하느님의 어린양 즉 구원자이시라고 증언합니다. 나자렛 시골에서 올라온 예수를 한번 보고서 하느님의 사람임을 요한은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을 눈여겨볼 것을 당부하며 말하였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Jn1,36) 이 표현은 아무나 쉽게 발설(發說)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는 남다른 혜안과 열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영으로 충만한 분이셨기에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의 정체를 꿰뚫어 보시고 증언하신 것입니다. 더더욱 자신을 찾아온 제자들이 길이 아닌 자신을 떠나 길이신 분을 따르도록 갈 길을 가로막지 않고 빗겨 서서 스스럼없이 자신을 밟고 넘어가도록 하셨으니 세례자 요한의 인물됨의 큰그릇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의 증언과 빗겨섬을 통해 스승이신 세례자 요한이 눈여겨보신 분, 예수님을 이제 제자들도 눈여겨보기 시작하고 그에게 관심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서서’ 즉각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자신을 뒤따라온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1,38)하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너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얻기 위해 나를 찾아왔느냐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Jn6,26 참조) 이렇듯 군중이 기대한 것은 육신 생명에 필요한 것들이었고 예수님께서 주고자 원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우리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가는 방향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분주한 우리를 향해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1,38) 하고 여쭙니다. 이것은 마치 동문서답을 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이 살고 계시는 <장소>를 물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를 ‘살펴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면서 예수님의 삶과 인격과 진리를 배우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주님과 함께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1,39) 하고 초대하십니다. 보통 초대는 아무한테나 더욱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는 것이 초라해서 보여주기 부끄러우면 찾아오겠다고 해도 오지 말라고 막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Mt8,20)라고 하셨는데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하느님 생명의 말씀을 직접 체험하고 깨달으라는 초대입니다.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묵으면서 그들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은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만나서 대화를 통해 그분이야말로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우물가에 물동이를 버려둔 채 고을로 달려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Jn4,29)라고 했습니다. 여인의 이 같은 전도 결과 그 고을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와서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4,42) <와서 보라.>는 것은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과 같이 와서 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존재는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과 함께 묵고 난 뒤 안드레아는 자신이 본 것을 형인 시몬에게 전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1,41) 예수님을 눈여겨 본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동생의 말을 듣고 베드로는 기꺼이 안드레아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안드레아가 시몬을 예수께 데려가자 예수님은 시몬을 ‘눈여겨보시며’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눈여겨보았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을 찾은 이들을 눈여겨보시고 그들 안에 담긴 하느님의 손길과 가능성을 보십니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표현처럼 현재가 아닌 미래의 가능성을 예수님은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 내면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자유를 향한 갈증을 영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사무엘서 사무엘의 부르심(상권3,3~10)이나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복음을 통해서 깨달은 점은 <신앙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눈여겨 보시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을 눈여겨 바라보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귀여겨듣는 것입니다.>라는 점입니다. 사무엘이 단번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마침내 스승인 엘리의 인도로 그 부르심에 응답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보아라>하신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그분을 알아보았듯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하느님께로 향하기만 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보고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눈여겨보고 있습니까? 당신의 인생에서 눈여겨보고 사는 것은 무엇이며 눈여겨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선한 마음으로 좋은 것을 눈여겨 바라보십시오. 좋은 것이 마음 안에 차오를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참된 것을 눈여겨보십시오. 진실한 삶이 보일 것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 바라보십시오. 그 사람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무얼 찾느냐? 와서 보아라.>(Jn1, 38.39)


  1. 재의 수요일: 마태오 6, 1 ~ 6. 16 ~ 18

    Date2024.02.13 By이보나 Views42
    Read More
  2.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마르코 8, 14 - 21

    Date2024.02.12 By이보나 Views22
    Read More
  3.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마르코 8, 11 – 13

    Date2024.02.11 By이보나 Views36
    Read More
  4. 설: 루카 12, 35 - 40

    Date2024.02.09 By이보나 Views40
    Read More
  5.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마르코 7, 31 – 37

    Date2024.02.08 By이보나 Views28
    Read More
  6.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마르코 7, 24 – 30

    Date2024.02.07 By이보나 Views40
    Read More
  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마르코 7, 14 – 23

    Date2024.02.06 By이보나 Views22
    Read More
  8. 성 바오로 미끼 동료 순교자 기념(연중 제5주간 화요일): 마르코 7, 1 - 13

    Date2024.02.05 By이보나 Views23
    Read More
  9. 성녀 아가타 순교자 기념(연중 제5주간 월요일): 마르코 6, 53 – 56

    Date2024.02.04 By이보나 Views24
    Read More
  10.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마르코 6, 30 – 34

    Date2024.02.02 By이보나 Views32
    Read More
  11.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1): 루카 2, 22 - 40

    Date2024.02.01 By이보나 Views22
    Read More
  12.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마르코 6, 7 – 13

    Date2024.01.31 By이보나 Views23
    Read More
  13. 성 요한 보스코 기념(연중 제4주간 수요일): 마르코 6, 1 – 6

    Date2024.01.31 By이보나 Views17
    Read More
  14.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마르코 5, 21 – 43

    Date2024.01.29 By이보나 Views28
    Read More
  15.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마르코 5, 1 – 20

    Date2024.01.28 By이보나 Views20
    Read More
  16.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마르코 4, 35 - 41

    Date2024.01.26 By이보나 Views25
    Read More
  17. 1월 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기념: 루카 10, 1 ~ 9

    Date2024.01.25 By이보나 Views18
    Read More
  18.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마르 16, 15 ~ 18

    Date2024.01.24 By이보나 Views20
    Read More
  19.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기념(연중 제3주간 수요일): 마르코 4, 1 - 20

    Date2024.01.23 By이보나 Views27
    Read More
  20.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마르코 3, 31 – 35

    Date2024.01.22 By이보나 Views30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4 Next
/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