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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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때론 저를 이해할 수 없고, 저를 수용할 수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7장의 가르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저의 나약함을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이 1866년에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소설을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현대인의 성격 분열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 문제를 다룬 소설이지요. 런던에 사는 지킬 박사는 학식과 인품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어느 날 먹으면 도덕심이 없는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하이드)으로 변신하는 약을 발명합니다. 선과 악의 두 성질이 한 인간에게 공존하는 것이 불행의 근원이라 생각한 박사는 그 한쪽만을 빼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을 복용하는 횟수가 거듭되는 동안 약을 쓰지 않아도 하이드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고, 마침내 영원히 지킬 박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현대인의 성격 분열과 인간의 이중성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오늘날 '지킬과 하이드'는 이중인격을 나타내는 관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수난과 성지주일이라는 이중적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늘 주일 전례의 독서와 수난사에는 예수님과 사람들의 대조적인 모습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사는 우리를 참으로 어려운 파스카 신비에로 이끌어주는 긴 이야기입니다. 수난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제공하는 키워드는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50,5)는 이사야 예언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본인이 원하셨기에 그래서 베타니아의 기름 바름의 이야기에서,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Mr14,8)와 만찬 중에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14,21) 그리고 게쎄마니에서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14,36)라는 고백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의自意로 죽음을 맞으러 가신 것은 인간의 깊은 죽음의 어둠까지 함께 하고 싶으셨고,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거부와 배반과 죽음에도 물러서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맡기셨고, 최후의 극적인 결과를 고스란히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수난 사화에는 예수님의 태도와 각 군상의 응답이 아주 극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각 부류의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어제와 같은 태도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데, 그분 앞에서 각각 다른 자세와 응답을 취합니다. 수난 사화에는 여러 작은 그림들이 모여 큰 그림을 완성합니다. 예수님과 유다,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경비병들,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과 빌라도, 예수님과 군중, 예수님과 군인들, 예수님과 형리들, 예수님과 조롱하는 사람들 등.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야기가 진전되어 갈수록 비하와 모멸이 점점 더 심해지고 마침내 죽음의 순간 그 절정에 다 다릅니다. 그와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은 철저한 침묵으로 그 중심에 꿋꿋이 머무십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혼란스럽고 소란한 분위기를 완전히 압도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 나온 여러 부류 중에서 가장 강하게 제게 다가온 부류는 군중이며 그들의 상반된 반응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의 군중의 모습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환호하는 군중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군중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에 흥분하였겠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벌이시리라 기대하였고 흥분 속에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표징에 호기심을 지니고 기웃거리는 군중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흥분한 군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어쩌면 이런 예수님과 군중들과의 차이는 이미 고향 마을 나자렛을 방문했을 때 예견되었다고 봅니다. 고향 사람들처럼 군중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씁니다. 전혀 다른 군중의 모습 곧 야누스처럼 변한 군중의 모습이 당황스럽습니다. 불과 닷새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이 이젠 완전히 악의 집단으로 돌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열광이 이제 예수님을 죽이고자 외치는 열광으로 돌변합니다. 인간의 변덕스럼과 배은망덕이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군중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 호기심 많고 변덕스런 군중을 도구로 삼아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야심을 이루려 했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은 군중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고 군중을 선동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군중을 선동하여 자신의 야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음흉한 정치인들과 공무원들, 가짜 학자들, 타락한 종교인들, 악덕 경제인들, 거짓 예술가들은 국민을 도구로 삼아,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웁니다. 군중을 휩쓸고 다니는 사회는 이성을 상실하고 구호와 편 가름으로 술렁대는 사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러한 군중심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하느님 앞에 인격적인 만남과 그 만남에 따른 체험에 바탕하지 못한 신앙은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군중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주님을 환영하고, 내일은 주님을 배신한 군중들, 확신 없는 신앙으로 세속적인 욕망으로 신앙의 껍데기를 기웃거리며 몰려다니는 군중 속에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인격적으로 서 있지 않고, 변덕스런 군중 속에 머무르는 한, 이천이십년 전에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여전히 그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한 셈입니다. 우리 역시 성서의 저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공모자들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여전히 저 군중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죄가 큰 만큼 극단적으로 그분의 용서와 사랑은 훨씬 넓고 길고 깊고 높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 앞에 겸허하게 나아간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반겨주시고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군중이 아닌 ‘나’의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고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었던 백인대장은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 찾아야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은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본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예수님이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믿었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에서 건져 주실 분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에서 깨어나고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의 여의사로 불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렇게 일깨웁니다.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은 우리에게 거듭 말하고 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지 말라’고,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삶’인 것이다.> 오늘 가장 값진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루살렘 입성의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군중과 같이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가기보다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까지 묵묵히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때만이 인생의 여러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도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길은 다름 아닌 우리도 그분이 하셨듯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되리라 봅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1. 사순 제3주간 수요일 : 마태오 5, 17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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