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조회 수 13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코로나 펜데믹 시기를 보내면서도 가장 활발한 분야는 정치 분야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기에 여당과 야당의 후보를 선출해야 하기 때문이지만, 그 때문에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관점이나 가치가 다른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서, <반대하지 않은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Mr9,40)고 하신 예수님의 표현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만은 없었나 봅니다. 여당이나 야당도, 진보도 보수도 극좌와 극우에 치중하던 정략에서 벗어나 중도 확장을 시도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견해를 은연중에 차용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65년 12월에 시작한 <한국종교 협의회>는 처음 6개 종단(=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개신교)으로 시작하여 2020년 다른 종파의 가입으로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이 협의회의 주된 목적이나 활동은 공동과제를 검토, 협의, 실천함으로써 사회 발전과 국가 발전, 더 나아가 인류 평화를 위해 봉사하며 종교 간 화합을 통한 한반도 평화 구축에 이바지하려는데 있습니다. 

 

사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타난 종교적 편협과 배타심은 지난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세상의 문제입니다. 제1독서 민수기 11, 25~29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먼저 모세를 도와 함께 일할 원로들을 선정하도록 하셨으며,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영을 내려주십니다. 그런데 원로로 임명받은 엘닷과 메닷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채, 그들의 진영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모세와 함께 듣고 있던 여호수아가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11,28)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여호수아의 의식이나 무의식 저변에는 배타적 선민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자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영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다.>(11,29)고 여호수아의 편협함을 일깨우고 보다 넓은 마음을 갖도록 촉구합니다. 모세의 여호수아에 대한 질책은 하느님의 영의 활동을 우리 마음대로 조정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해서는 아니 되며, 우리는 단지 하느님의 도구일 뿐 다른 형제들의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응답을 우리의 기준이나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열린 마음은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를 목격했고(Mr9,2-10),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9,29)고 질책당했던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참으로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Mr9,38)고 말합니다. 사실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사도들에게 중요한 권한이었고, 마귀를 쫓아내는 활동은 곧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실현의 증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지도 않았고, 함께 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상표도용이며 저작권 위배에 해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자기들에게만 유보된, 증여된 권한을 침해당한 것이었기에, 그런 행위를 못 하게 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응답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예전 공동 번역의 표현은 <막지 마라.>(9,39) 보다 더 강력하게 <꾸짖으셨다.>라고 했었습니다. 왜 꾸짖으셨을까요? 요한이 전한 내용은 예수님 당신의 생각이나 의도와는 전혀 달랐으며, 오히려 당신이 하시고자 하셨던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 구절(9,33-37)에서 예수님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37)라고 말씀하시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셨는데도,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9,38)고 말한 요한과 제자들 아니 우리 모두에게 옹졸한 생각을 질책하신 겁니다. 더더욱 요한의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못 하게 막았습니다.>라는 표현엔, 네 편이냐 내 편이냐는 편 가르기의 일환인 종교적 편협함과 배타심이 짙게 드러납니다. 솔직히 요한의 표현에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도록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요. 이런 요한의 표현은 요즘 여당과 야당이 서로 공격할 때 자주 표현하는 내로남불의 편파 의식이나 특권의식이 짙게 풍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종교인의 생각은 하느님 일보다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악마적이기에 그리스도인다운 생각이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따르고 섬기는 제자들의 편협한 정신과 종교적 배타심은 그분이 보기에 불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시선과 태도를 드러냈던 제자들의 모습이 왜 이렇게 낯설지 않고 익숙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저나 여러분도 동의하고 동감하겠지만 요즘 세상에서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편협한 정신과 종교적 배타심을 가지고 다른 종교에 대해 극단적인 태도나 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과 이런 정신에서 나오는 극단적인 행위는 예수님을 불편하게 안타깝게 하지만, 우리 역시도 뉴스 미디어를 통해 듣고 보게 될 때 그리스도인으로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일 뿐인데,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비난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서 절을 태우거나 문화재를 훼손하는 행위는 범죄 행위이며, 이를 행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 종교나 종파에 대해서 편협하고 배타적인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몰지각하게 반종교적이고 반문화적인 행위를 범합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인종이나 종교, 사상이나 신분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인 우리에게 극단적인 말과 행위를 하는 일부 몰지각한 그리스도인을 오히려 <막아라.>고 당부하실 것입니다. 
 
왜냐햐면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에게 악한 행위를 범한 사람이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자신이 그 지옥으로, 죄악으로 떨어지기에 죄를 짓게 하는 죄의 뿌리를 잘라내라고 예수님은 혹독하게 말씀하십니다. 곧 죄를 불러들인 마음의 뿌리를 절단하는 상징적인 손과 발과 눈을 없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죄짓게 하는 그 사람의 신체의 소중한 손-발-눈을 잃을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을 잃은 불구로 발을 잃은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눈을 잃은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9,43-47참조)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품 삵을 착취한다면 그로 인해 획득한 재물이 오히려 자신을 갉아먹는 녹이 될 것이며, 그 재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모든 권고는 결국 신체의 일부를 손상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보다 나으며, 재물을 잃는 것이 생명을 잃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권고는 인간의 윤리적 의무의 차원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위한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선택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의 태도와 행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잃는 것은 신체와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나 인종을 넘어서서 이제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의 일원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상생과 공생하는 삶과 길을 모색하고 추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낭독되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복음 구절에서,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9,50)고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복음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생명과 진리의 소금이며 빛입니다.


  1. 재의 수요일: 마태오 6, 1 ~ 6. 16 ~ 18

    Date2024.02.13 By이보나 Views42
    Read More
  2.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마르코 8, 14 - 21

    Date2024.02.12 By이보나 Views22
    Read More
  3.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마르코 8, 11 – 13

    Date2024.02.11 By이보나 Views36
    Read More
  4. 설: 루카 12, 35 - 40

    Date2024.02.09 By이보나 Views40
    Read More
  5.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마르코 7, 31 – 37

    Date2024.02.08 By이보나 Views28
    Read More
  6.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마르코 7, 24 – 30

    Date2024.02.07 By이보나 Views40
    Read More
  7.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마르코 7, 14 – 23

    Date2024.02.06 By이보나 Views22
    Read More
  8. 성 바오로 미끼 동료 순교자 기념(연중 제5주간 화요일): 마르코 7, 1 - 13

    Date2024.02.05 By이보나 Views23
    Read More
  9. 성녀 아가타 순교자 기념(연중 제5주간 월요일): 마르코 6, 53 – 56

    Date2024.02.04 By이보나 Views24
    Read More
  10.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마르코 6, 30 – 34

    Date2024.02.02 By이보나 Views32
    Read More
  11.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1): 루카 2, 22 - 40

    Date2024.02.01 By이보나 Views22
    Read More
  12.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마르코 6, 7 – 13

    Date2024.01.31 By이보나 Views23
    Read More
  13. 성 요한 보스코 기념(연중 제4주간 수요일): 마르코 6, 1 – 6

    Date2024.01.31 By이보나 Views17
    Read More
  14.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마르코 5, 21 – 43

    Date2024.01.29 By이보나 Views28
    Read More
  15.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마르코 5, 1 – 20

    Date2024.01.28 By이보나 Views20
    Read More
  16.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마르코 4, 35 - 41

    Date2024.01.26 By이보나 Views25
    Read More
  17. 1월 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기념: 루카 10, 1 ~ 9

    Date2024.01.25 By이보나 Views18
    Read More
  18.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마르 16, 15 ~ 18

    Date2024.01.24 By이보나 Views20
    Read More
  19.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기념(연중 제3주간 수요일): 마르코 4, 1 - 20

    Date2024.01.23 By이보나 Views27
    Read More
  20.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마르코 3, 31 – 35

    Date2024.01.22 By이보나 Views30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4 Next
/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