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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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MZ세대라고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들의 모든 생각이나 행위가 무조건 나쁘다고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나친 소비문화와 <원하는 것을 욕망하고 욕망하는 삶을 살라!>고 부추기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둥거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쩐지 불편합니다. 샤넬 백 하나 사려고 줄을 5시간씩 왜 서는 거지? 스타벅스 레디백 받으려고 새벽부터 예약 대기를 왜 하는데? 유명 맛집이라는 식당에 들어가려고 1시간씩 웨이팅을 하는 까닭은 뭐지? 왜 명품을 중고로 되팔아서 다시 그 돈으로 새것을 사는 거지? 왜 빚을 영끝해서 라도 아파트를 사려하고, 연봉이 1억도 넘지 않으면서 굳이 외제 차를 할부로 타고 다닐까? 이렇게 제 의문은 끝이 없습니다. 하기야 요즘 초등학생의 꿈 상위권 목록이 유투버-건물주-연예인-공무원이라고 하며, 그들도 누군 무슨 아파트에 살고 몇 평이며, 전세고 自家라면서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욕망 지상주의와 자본주의의 위대한 힘을 느낍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출세와 욕망 사회로 변질해 버렸습니다. 온 사회 구성원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니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세상살이인 것처럼 보입니다. 욕망에 미친 사회는 출세를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고 돈을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출세는 곧 부의 축적이며, 권력은 엄청난 재산 축적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출세와 욕망이 최고가 된 사회는 올바른 삶의 기준과 양심과 정의가 사라지기 때문에 사회를 지키는 기본원리가 무너져 결국 사회 전체가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라고 말하였지만, 버린 것이 버린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오늘 복음(마르10, 35-45)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그들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의 버림(=포기)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본인 자신들의 출세 욕망 때문이었나 봅니다. 분명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머지않아 당신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서 <조롱받고 침 뱉고 채찍질 당하고 나서 죽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음에도, 그들은 스승의 말씀을 듣고도 알아듣지 못했고, 공감은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앞날에 누릴 출세에만 마음이 쏠렸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야고보와 요한은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10,37) 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그들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진정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간청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 역시 표현하고 표현하지 않은 차이는 있겠지만 속내는 비슷합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이를 숨기려 하기보다 오히려 드러내서 표현합니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10,41) 이는 곧 그들 가운데 암투가 시작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에스트로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자신의 왕국이나 세계 전체를 떠났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그대로 움켜쥐고 있다면, 실상 그는 아무것도 떠난 것이 아니다. 진정, 자기 자신을 놓아야,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놓은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교가에도 보면,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고 노래하며 수년간 수학했지만, 이 노래가 사제들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한 시절이 아니라 전 생애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이상이 아니라 실제적 행동이며 삶이어야 합니다. 외적인 것을 버리는 거야 가능하지만, 외적인 모든 것을 놓고 버린 자신마저 놓고 버리는 게 더 중요하고 힘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떠남과 버림은 이탈과 포기 자체나 자신을 출세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더 높은 가치이며 이상인 하느님 나라와 예수님 당신이 사셨던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10,43-44) 이처럼 떠남과 버림은 섬김을 위한 것이며, 섬김은 보다 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한 결단이며 자발적인 봉헌의 행위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훗날 이를 온전히 깨닫고 삶으로 실행하기 위해서 그들 역시도 예수님처럼 처절한 파스카의 삶을 자신들의 삶으로 살아갈 때 성취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10,38)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다짐하듯이 물으셨으며, 당신의 잔을 마실 것을, 당신이 받을 세례를 받을 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처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고 (10,39) 하였지만, 그 응답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질문하신 의도를 완전히 깨닫고 한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높은 지위나 남보다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겪어야 할 과정, 십자가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일러주고 있으며, 이를 실행하는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인도의 데레사 수녀님이 어느 날 한 마을에서 다친 아이들의 상처를 지극 정성으로 치료해 주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웃 주민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 “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십니까? 수녀님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라고. 그러자 데레사 수녀님은 그분에게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은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라고 친절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따뜻한 하루’에서) 어쩌면 오늘 복음의 내용이 수녀님의 이 한마디 답변에 온전히 녹아 있다고 느껴집니다. 수녀님은 오래도록 참된 섬기는 삶을 살았기에 그런 표현으로 즉각 답할 수 있었을 겁니다. 소리가 아닌 몸으로, 온 존재로 답하신 것입니다. 무릇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섬기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바로미터(=지표)입니다. 

인간의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봉사하는 인간>, <섬기는 사람>이듯이, 교회의 가장 거룩하고 은혜로운 모습은 <봉사하는 교회>,< 섬기는 교회>입니다. <섬김>은 <겸손>과 같은 윤리적인 교훈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본질적인 실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은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 섬김을 받으려는 삶에서 섬기는 삶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은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섬기려는데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4,16)고 권고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섬기는 사람, 섬기는 삶을 살도록 나아갑시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복음 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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